게르트 기거렌처와 뮈어 그레이가 편집한 <더 나은 의사, 더 나은 환자, 더 나은 결정: 2020년 보건의료에 대한 상상> 책자 http://goo.gl/V9CLa8 9장 제목은 '의사들의 통계맹(Statistical Illiteracy in Doctors)'이다. 최근 갑상선암 검진 논쟁 중에 검진 효과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의사들이 조기검진의 이득과 손해를 알고 있는지, 의사들이 5년 생존율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룬 두 대목을 옮겨둔다. 기거렌처 선생이 언급한 독일 의사들 사례를 보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한국 의사들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의사들이 조기검진의 이득과 손해를 알고 있는가?


위의 사례는 많은 부인과 의사들이 유방촬영술의 이득과 손해를 거의 모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상황이 부인과 전문의에만 국한된 독특한 상황인가?

전립선암특이항원(PSA) 검진을 살펴보자. 2004년 미국 소비자 보고서와 같은 위상을 지닌 독일 슈티프퉁 바렌테스트는 비뇨기과 전문의 상담의 질을 조사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 내과의사인 60세 남자가 신분을 숨기고 베를린에 있는 135명의 비뇨기과 전문의 중 무작위로 뽑은 20명을 방문하여 PSA 검진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Schtiftung Warentest 2004). 의학회 지침에는 환자한테 처음으로 PSA 검사를 실시하기 전에 철저하고 체계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 예를 들어, 상담 의사는 PSA 검사가 암을 놓치거나 잘못된 경보를 내릴 수도 있음을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환자 역시 실제 양성 결과가 나올 지라도 (비진행성 암이 있으므로) 모든 암이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치료가 요실금이나 발기부전과 같은 손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환자는 기대할 수 있는 이득과 손해가 얼마나 큰 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PSA 검진은 남성 1,000명 당 0에서 0.7명의 전립선암 사망을 예방한다(Andriole 등. 2009; Schröder 등. 2009). 미국에서 수행된 무작위 시험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전체 암 사망 측면에서 PSA 검진은 단 한 명도 살리지 못했다(Andriole 등. 2009). 반면, PSA 검진은 손해를 입힐 수 있다. 유럽에서 수행된 무작위 시험(Schröder 등. 2009) 결과 검진을 받은 남성 1,000명 중 약 30명이 만일 진단되지 않았다면 일생 동안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거나 사망에 이르게 되지도 않았을 비진행성암으로 치료받게 될 것이고, 이들은 검진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20명의 비뇨기과 전문의 중 단 2명만 적절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환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다른 네 명은 정보의 일부만 알았다. 한편, 비뇨기과 전문의 대다수인 14명은 환자의 질문에 대부분 답할 수 없었고, PSA 검진으로 생명 연장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잘못 주장했으며,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의사들이 5년 생존율을 이해하고 있는가?


검진 이득은 종종 시간이나 집단 사이 5년 생존율의 변화로 짜맞춰진다. 그러나, 5년 생존율이 더 높다고 해서 항상 환자가 더 오래살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5년 생존율의 변화는 사망률의 변화와 상관성이 없다(r=0.0)(Welch 등. 2000). 이와 같이 상관성이 없는 이유는 두 종류의 바이어스 때문이다. 첫째, 검진은 사망 시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고 조기 진단만 하게 되어 발견과 사망 사이 시간을 늘린다(조기발견 lead-time 바이어스). 둘째, 검진은 비진행성 암 사례를 발견하여 생존율을 부풀린다. 왜냐하면 정의상 이러한 사람들은 진단된 암으로 죽지 않기 때문이다(과잉진단 overdiagnosis 바이어스). 의사들은 5년 생존율 변화라는 잘못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최근 연구(Wegwarth 등. 2012)에 독일의 내과 전문의 65명을 대상으로 미국 암등록자료(SEER)에 나와 있는 전립선암의 5년 생존율과 질병 특수 사망률 데이터를 제시한 결과가 나와 있다. 5년 생존율 변화를 검토한 의사 중 66%는 검진이 믿을만하고 미래의 환자들에게 반드시 권고해야 되겠다고 느꼈으며, 79%는 효과적이라고 판정했다. 반면, 사망률 데이터를 제시했을 때, 같은 의사 중 단 8%만 검진을 권고했고 5%만 효과적이라고 판정했다. 의사들에게 매년 1,000명의 남성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망이 예방될 수 있을지 추정해보도록 물었다. 5년 생존율을 제시했을 때 평균 150명의 사망을 예방한다고 추정했지만, SEER 자료에서 전립선암 사망률 감소는 0명이다. 사망률을 보여줬을 때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의사가 생명 연장이 한 명도 없음을 이해했다. 최종적으로, 단 두 명의 의사만 조기발견 바이어스의 개념을 이해했고, 과잉진단 바이어스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연구는 5년 생존율이 암검진의 이득에 대해 의사들을 오도하고 있으며 사망률이 좀더 교육적임을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 또다른 사례는 상대 위험과 절대 위험의 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Andriole GL, Crawford ED, Grubb RL 3rd., et al. Mortality results from a randomized prostate-cancer screening trial. N Engl J Med 2009;360(13):1310-1319. http://goo.gl/IdJkl

Schröder FS, Hugosson J, Roobol MJ., et al. Screening and prostate-cancer mortality in a randomized European study. N Engl J Med 2009;360(13):1320-1328. http://goo.gl/mxzIGE

Wegwarth O, Schwartz LM, Woloshin S, Gaissmaier W, Gigerenzer G. Do physicians understand cancer screening statistics? A national survey of primary care physicians in the United States. Ann Intern Med 2012;156(5):340-349. http://goo.gl/i6dV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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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3쇄를 찍게 되면서, 2쇄를 찍으면서도 찾아내지 못한 오탈자를 바로잡습니다. 사서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금 고맙습니다. (2014년 1월 20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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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쪽, 347쪽, 367쪽, 368쪽의 "토마스 베이즈"를 "토머스 베이즈"로 수정.

222쪽 19째 줄 "방사선 사진autoradiogram"을 "자가조직방사선사진autoradiogram"으로 수정.

274쪽 [표 12-1] "내과적 치료(비외과적"에 오른쪽 괄호 추가.

307쪽 인용문 6째 줄 "토마스 제퍼슨"을 "토머스 제퍼슨"으로 수정.

317쪽 6째 줄 "corecctness"를 "correctness"로 수정.

321쪽 18째 줄 "미국예방서비스특별위원회"를 "미국예방의료특별위원회"로 수정.

363쪽 6째 줄 "체리"를 "버찌"로 수정.

368쪽 4째 줄 "니콜라스 손더슨Nicolas Saunderson"을 "니컬러스 손더슨Nicholas Saunderson"으로 수정.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2쇄를 찍게 되면서 1쇄에 생긴 오탈자와 오역을 바로잡습니다. 읽고 지적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2013년 10월 22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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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쪽 8째 줄 "하지만 흡연이 얼마나 건강에 위험한지 대중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중복 인쇄되어 삭제.


59쪽 7째 줄 "일괄되게"는 "일관되게"로, 16째 줄 "항성성"은 "항상성"으로 수정.


130쪽 14째줄 "민감도(참양성율)"는 "민감도(참양성률)"로, "특이도(위양성률)"는 "특이도(참음성률)"로 수정.


144쪽 18째줄 "fetal"은 "fecal"로 수정.


150쪽 22째줄 "잠혈 검사를 받은 1만 명"은 "잠혈 검사에서 양성인 1만 명"으로 수정.


195쪽 앨런 M. 더쇼비츠 인용문 첫 문장 "진실만, 완전한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진실이 아닌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습니다."를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로 수정.


204쪽 15째줄 "즉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의 대부분이 폭행당하는 여성이었다는 사실은"을 "즉 학대당하다 살해된 여성 대다수(9명 중 8명)가 파트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으로 수정.


238쪽 8째 줄 "위양성율"은 "위양성률"로 수정.


239쪽 [그림 10-2] 설명문 중 두 곳의 "프로필"을 "프로파일"로 수정.


327쪽 [그림 14-1] y축 제목을 "정답 백분율 중앙값"으로 수정.


346쪽 13째 줄 "민감도 및 위양성"을 "민감도 및 위음성"으로 수정.


353쪽 11째 줄 "false nagative"를 "false negative"로 수정.


357쪽 조기 진단early detection 항목 제목과 설명의 "조기 진단"을 모두 "조기 발견"으로 수정.


359쪽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 항목 첫 줄 "위약 효과"를 "플라세보 효과"로 수정.


368쪽 4째 줄 "니콜라스 선더슨"을 "니콜라스 손더슨"으로 수정.


383쪽 4째 줄 "가능성 비율"은 "가능도 비"로 수정. 6째 줄 수식 분모의 G 중 두 곳 빠진 윗줄 추가.


393쪽 6째 줄 수식 좌변 분모 "p(not-H)"를 "p(not-H|D)"로 수정.


403쪽 Douglas, M. & Wildavsky, A. (1982) 뒤에 "한국어판: 김귀곤, 김명진 옮김, [환경위험과 문화: 기술과 환경위험의 선택에 대한 소고], 명보문화사, 1993." 추가.


404쪽 Feynman, R. P. (1967) 뒤에 "한국어판: 안동완 옮김, [물리법칙의 특성], 해나무 출판사, 1992." 추가.


405쪽 "Garnick, A. (1999, October 4)"를 "Gawande, A. (1999, October 4)"로 수정. "Garnick, M. B. (1994). The dilemmas of prostate cancer. Scientific American, 270, 52-59."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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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강형평성학회 소식> 제2호(2008.2)에 『지도와 권력』을 읽고 쓴 서평이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조립한 글이라 애초에 생각했던 논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마무리한 듯한 아쉬움이 든다. 『지도와 권력』은 2012년 9월에 『세계지도에서 권력을 읽다』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와 있다.


아서 제이 클링호퍼 저/이용주 역 | 알마 | 원제 The Power of Projections | 2007년 10월


사회과부도건 지리부도건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도책에서는 백제군과 신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십자군의 수차례 침공을 막아내는 이슬람군의 놀라운 전술이 있었으며, 대나무와 쌀보리가 차령산맥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시한 위인전 빼고는 달리 읽을거리가 없던 소년에게 지도책은 나와 세상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패스워드였다.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다니던 부동산에도 벽에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책에 나오는 논밭과 임야 기호, 그리고 등고선은 희미하기만 하였다. 각종 재개발 예정지, 지하철 역사 선정지 등 한 푼이라도 더 높은 값으로 매겨지기 위해 안달인 표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출금으로 전세 아파트를 구하려는 청년에게 지도는 모든 물질이 돈으로 환산되어야한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확인시켜주는 삽화였다.


『지도와 권력』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투영된 권력: 지도는 어떻게 국제 정치와 역사를 반영하는가(The Power of Projection: How Maps Reflect Global Politics and History)이다. (필자가 편집자였다면 '와'라는 건조한 조사로 연결된 제목보다 원제에 가깝게 『투영된 권력』 또는 『지도는 권력이다』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저자 아서 제이 클링호퍼 교수는 미국 럿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다수의 저서를 통해 인권, 학살, 소비에트, 아파르트헤이트, 원유와 금의 정치학 등의 주제를 다룬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지도 제작자의 관점이 어떻게 지도에 투영되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현대까지의 다양한 지도 제작 원리를 탐구하여 지도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저자의 주요 논지는 실제로 3차원인 지구를 2차원의 지도로 만드는 과정에는 반드시 왜곡이 개입될 것이고, 이러한 왜곡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지도 제작자의 의도와 제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가 투영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 지도하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도가 바로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에 의해 그려진 세계지도다. 이 투영도법에 따르면 위도가 적도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면적이 넓게 그려져서 북아메리카와 유럽이 아프리카나 인도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실제로는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 면적의 3분의 2 정도이며, 유럽 전체가 인도와 비슷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지도 제작자 메르카토르가 살고 있던 16세기 유럽의 시대적 한계와 지도 판매라는 상업적 고려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지도를 통해 전세계 학생들에게 서양 중심의 지리관과 세계관을 심어주는 구실을 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메르카토르 투영도법(Mercator projection) 세계지도(출처: 위키피디아)


반면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하여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린 경우도 있었다. 독일 출신 아르노 페터스는 지도가 사회정의 구현과 투쟁에서 중요하다고 믿었고, 등면적 도법을 이용하여 '백인 우월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근거한 과거의 세계지도와 달리,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도를 그리고자 했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크기가 줄어들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커져서 세로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지도는 지리학계에서는 배척당했지만 상업적 의도에서 기획되어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세계관 수립에 일조한 메르카토르 지도에 대한 도전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지녀서 저자는 이 둘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골-페터스 투영도법(Gall-Peters projection) 세계지도(출처: 위키피디아)


이 책은 "지도는 세계의 역사와 정치를 묘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반영에 불과하"므로, 지도 제작의 "과정을 숙고하고 그것을 만든 제작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는 저자의 의도가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므로, 밑줄 그어가며 심각히 읽지 않아도 지도 제작에 얽힌 정치와 역사의 이면을 파악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관련 분야의 전공자에게도 70여 쪽에 달하는 후주가 달려 있어서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2006년에 초판이 나온 책답지 않게 전지구위치확인시스템(GPS)이나 지리정보시스템(GIS)의 활용과 보급에 담긴 정치사회적 의미와 개인이 맞춤형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된 컴퓨터 환경의 발전과 잠재력에 대해서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지 못하고 저널리즘적 해석을 경계해야 된다고 언급하고 넘어간 점은 아쉽다.


현재 건강형평성 연구 분야에서는 좀더 다양하고 과감한 형태의 테마 지도의 제작과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 수준뿐만 아니라 집단 수준, 특히 지역 수준의 건강형평성 제고를 위해서 지역 단위의 기본적인 시각화는 필수적이다. 최근 월드맵퍼(Worldmapper: The Human Anatomy of a Small Planet) 연구는 전 세계의 공중보건비용을 지도화하고,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역별 영아 사망률, HIV/AIDS 유병률, 말라리아 발생건수 등을 왜곡시켜 지도화한 것으로 흥미로운 연구 사례이고, 지역 수준의 건강형평성 제고를 위해 공간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리정보시스템을 활용한 연구의 질과 양이 날로 증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를 위해서는 Social Science and Medicine 통권 65권 9호, 2007년 11월호 특집호를 보라.)


영아사망률 세계 분포(출처: 월드맵퍼)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내게 세계를 알려주셨고, 내가 플라스틱 삽으로 땅을 파내려 간다면 결국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던" 부모님께 책을 바친다고 하였다. 한국의 건강형평성 연구에서도 '생태학적 오류(ecologic fallacy)'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공간 정보를 활용한 연구가 날로 늘어나기를 기대하며 관심 있는 회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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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의료연구원 소식지 <근거와 가치> 2012년 가을호(통권 20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 이야기] 코너에 영화 '유돈노우잭'에 대한 감상평을 써서 보냈다. 쓰기 시작할 때는 커트 보니것 선생이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시도한 대화 형식으로 재밌게 구성해보려 했으나 능력 부족을 절감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Jack Kevorkian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제27차 외래어 심의회 1999년 4월 22일)에 따르면 잭 키보키언이다. 표기법에 맞춰 써보냈더니 편집자가 모두 케보키언으로 바꿔놓았다.


잭 키보키언을 아시나요?

- 영화 '유돈노우잭'에 대한 단상


가을 태풍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밀린 일과 원고 마감에 힘겨워하다 잠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맞춰 의식은 푸른 터널을 통과했다. 긴 터널 끝에 백발의 노인 잭 키보키언이 서 있었다.


황승식(이하 황): 키보키언 박사님 아니신가요? 텍사스 주 헌츠빌의 독극물 주사 사형실에서 풀려나신 건가요?

잭 키보키언(이하 키): 내가 미국에서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구려. 커트 보니것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 다시는 임사체험을 위해 사형실로 불려 가지는 않는다오.

황: 한국에서도 선생님은 ‘죽음의 의사’로 알려져 있죠. 그나저나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 의사 조력을 얻진 않으셨던데, 무슨 이유가 있으셨나요?

키: 나야 간암에 신장도 나빠져서 고통 없는 상태로 죽음을 맞았으니 굳이 다른 의사나 약물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없었지. 그걸 캐묻기 위해 여기까지 왔소?

황: (당황하며) 아뇨, 오늘은 선생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유돈노우잭> 얘기를 듣기 위해 찾아왔어요. 알 파치노 연기는 마음에 드셨나요?

키: 대단했지! 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캐릭터 분석을 많이 했어. 알이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탈 때는 내가 직접 시상식까지 가서 축하해줬지.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많이 봤소?

황: 저도 에미상 시상식 장면을 봤는데 배우보다 선생님께서 더 기쁜 표정이시던데요? 아쉽게도 케이블 영화라 한국에서 극장 개봉은 못 하고 바로 DVD로 출시됐어요.

키: (기침하며) 아, 그랬군. 나도 2007년에 출소한 뒤로 알을 처음 만났다네. 참 멋진 배우야.

황: 췌장암 진단을 받고 선생님 조력으로 세상을 마친 시민운동가 역할을 한 수전 서랜든은 어땠나요?

키: 알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여배우와는 처음으로 연기해서 기뻤다더군. 나는 수전과 자주 만나진 못했는데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큰 키라 올려다보기 힘들었다네.

황: 저는 선생님이 재판정의 판사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키: 베리(베리 레빈슨 감독을 말함)가 갑자기 한 번 해보겠느냐고 물어서 흔쾌히 수락했지. 내가 재판을 여러 번 받아봐서 판사 연기하긴 어렵지 않았다네(웃음).

황: 푸른 터널 끝에서 혹시 선생님 도움으로 이곳에 온 사람을 만나진 않으셨나요?

키: 여기가 생각보다 넓은 곳이라 아직 한 명도 못 만나기는 했지만 만나면 틀림없이 나한테 고마워할 거라네.

황: 제가 아직 여기 오기엔 일러서 곧 되돌아가야겠네요.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웠고요, 혹시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키: 나를 욕하기 전에 일단 영화를 꼭 한 번 보라고 하고 싶네. 한국도 고통스럽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를 본인이 충분히 판단 가능한 때가 되지 않았소?


의사 조력 자살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많은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되 죄인을 미워하기 십상이다. 자비로운 살인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도 죽음의 의사인 잭 키보키언과는 선을 긋는다. 〈유돈노우잭: 잭 키보키언의 삶과 죽음〉은 2010년 미국 케이블 채널 HBO에서 상영된 영화로 미시간 주 병리학자인 잭 키보키언의 일대기를 다뤘다. 키보키언 역은 배우 알 파치노가 맡아 열연을 펼쳐 62회 에미상과 68회 골든글로브상 남우주연상 부문을 휩쓸었다. 전기 영화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잭 키보키언의 전기는 순교자로 가장한 자기애적 열정을 풀어놨지만, 알 파치노는 가장 비열한 악당에게도 애정을 품게 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역할에 침잠하면서도 결코 키보키언의 괴짜 같은 매력이 캐릭터의 병적인 자기애를 덮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안경을 쓰고 평범한 외모로 등장하는 수전 서랜든은 키보키언과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지역의 헴록 협회 대표인 자넷 굳 역을 맡아 기민한 연기를 펼쳤다.

안락사에 대한 영화는 아무리 대본을 신중하게 집필했다고 해도 찬성과 반대, 어느 한 쪽의 공격과 비난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양쪽이 불평할 만한 꺼리를 찾아내는 데서 타협하게 된다. 영화는 죽음의 의사라는 별명이 붙은 남자의 죽을 권리를 향한 열정과 편협한 자기애라는 양면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베리 레빈슨 감독은 1998년 키보키언이 토마스 유크에게 치명적인 약물을 주입하는 장면을 보여줬던 “60분” 장면 일부를 포함하여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를 구성했다. 이 사건으로 키보키언은 1999년에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7년에야 가석방됐다. 키보키언은 언론에 자신을 설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미국에서 말기환자 치료를 나치 실험에 비교하거나 미국을 전체주의로 묘사하는 등 극단적인 수사로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의료윤리나 다른 전문가의 의견 또는 법적 구속에 대해 부주의했고, 환자의 말과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했다. 영화는 키보키언의 죽을 권리 실행에 대한 열의와 독선, 그리고 오싹한 비열함을 잘 포착했다. 그는 자신의 피를 이용해 오싹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직접 만든 낡은 죽음으로 이끄는 기구를 제작하며, 낡은 승합차를 이용해 환자를 죽음으로 이끌기도 했다.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설득력을 훼손하진 못하고, 유창하지 못한 연설이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도 있다. 영화 〈유돈노우잭〉은 죽음을 옹호하는 한 노인을 사려 깊고 통찰력 있게 묘사한 수작이다. 케이블 채널 HBO에서 제작한 관계로 국내에서는 극장 상영을 못하고 바로 DVD로 판매된 점은 몇 년이 지나도 애석하지만, 몇 개의 영화가 스크린을 과점한 시대에 과연 상업적 상영이 가능했을지 의문이긴 하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지난 2009년 김 할머니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 이후로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이라는 용어 통일과 관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했고,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률적 보완과 사회적 합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011년 현재 한국은 하루 평균 44명이 자살하고 20대 사망자 중 절반은 자살이며, 급속한 노령화에 노인 자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살 공화국이다. 키보키언은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망 없이 연명하고 있는 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과격하게 주창했다. 한국 사회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고, 누릴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데도 실패했다. 이래서는 키보키언이 설파한 존엄하게 죽을 권리 논의를 감히 꺼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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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8월 24일 사회역학연구회 세미나에 비센테 나바로 교수의 1997년도 미국공중보건학회 연례 학술대회 수상 연설문을 옮기고 요약해 발표했다.




출처: Viscente Navarro, A Historical Review (1965-1997) of Studies on Class, Health, and Quality of Life: A Personal Account,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 1998:28(3):389-406.


계급, 건강, 그리고 삶의 질에 대한 연구의 역사적 고찰(1965-1997): 개인적 평가


1997년 11월 12일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개최된 미국공중보건학회 연례 학술대회 보건의료 부문에서 발표한 연설에 기초한 것임.


내가 세션의 조직위원으로부터 받은 초청장에는 지난 35년간 지속적으로 몸담아온 정치적 맥락 속에서 계급과 건강의 관계에 쏟은 내 인생 역정에 대하여 연설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피력되어 있었다. 나는 또한 “아무개와의 저녁”이라는 세션을 진행하면서, 조직위원들이 계급과 건강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계 내에서도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고 언질을 준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 덕분에 미국 학계가 자주 비판받고 있는 역사적 전망의 부재를 교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역사와 경험이라는 느낌을 깨닫길 원하고 있을 젊은 세대와 그 경험을 공유하도록 35년 동안 이 주제에 관해 연구해 오고 있는 한 사람을 초청하게 되었지 않나 싶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와의 연계와 연속성을 맺도록 노력할 것이고, 여러분과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되는지에 대한 내 경험, 생각, 그리고 인상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여러분이 요청한 바와 같이 이 주제에 대해 내가 참여한 바를 설명하는 간략한 기록으로 시작하겠다. 참여는 그저 학문적이지 않다. 내가 매우 어렸을 때의 강렬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카탈루냐와 스페인의 반파시스트 지하조직에서 싸웠을 때, 수백만 명이 자유, 민주주의, 연대,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던 전투 — 정당한 전투였다 — 언젠가는,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룩할 것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향해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내 가족과 절친한 친구를 포함하는 수백만 명이 이러한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20세기에 싸웠고, 죽었고, 살해당했다. 그러한 투쟁의 시대는 내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모든 사람이 열망하는 건강과 삶의 질의 수준을 성취하도록 인류 사회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을 인정하고, 계급 관계를 초월하기 위해 계급 관계에 대한 연구를 평생토록 수행해야 되겠다는 동기를 부여했다.

나는 정치적 이유로 1962년에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다. 이러한 정치적 망명은 처음에는 스웨덴으로 그 이후에는 영국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많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났지만,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 특별히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당시 노르웨이 보건부 장관이었던 칼 에방Karl Evang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에딘버러 대학의 어셔 연구소 교수이고 후에 스코틀랜드 보건부 장관이 된 존 브라더스톤John Brotherston이다. 내 지적인 삶이 스페인의 그람시라 할 수 있는 마뉴엘 새크리스탄 아래에서 공부함으로써 틀이 잡혔다면, 보건 분야에서 내 전문적인 삶은 당시 에방과 브라더스톤에 의해서 대부분 영향을 받았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스탐파Stampar와 함께 바로 그 사람들이 1948년에 그 유명한 세계 보건 기구의 건강에 대한 정의를 썼다. 이는, 여러분이 기억을 되살려보면, 질병이 없음 그 이상으로 정의되었고, 단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것뿐 아니라 개인과 전국민의 사회적 안녕이 우리의 공중 보건 계획의 목적이 되어야 함을 천명했다. 그러므로 건강에는 생물학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그 근저에 있음을 보았다. 이는 건강과 의료에 대한 전통적 이해의 측면에서라면 커다란 타파였고,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구조와 사회적 관계라는 진정한 맥락 속에 건강과 의료를 두게 했다.

지금은 의학 서적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는 정의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건강의 정의가 2차 세계 대전 후에 반파시스트 세력에 대한 승리로써 얻어진 협정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본질적으로 반파시스트 전쟁이라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것은 전쟁이 종결되면서 솟구치게 된 높은 수준의 기대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대중 계급이 치른 엄청난 희생은 더 낳은 미래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수행되었던 것이었다. 협정의 이면에 있는 세 가지 주요한 동력은 미국에서의 뉴딜주의자, 서구 유럽에서의 사회 민주주의 정부, 그리고 동구 유럽에서의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노동 계급과 그들의 노동 운동이 중간 계급과 맺은 동맹이라는 정치적 수단이 그 협정 이면의 주요한 동력이었고, 다수 대중의 건강과 삶의 질을 대폭으로 향상시켰던 사회적 전달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책임을 지도록 부여하기 시작할 근거가 확립되었다. 동구와 서구 유럽 모두에서, 노동 운동은 그 사회에서 계급 관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이론적 틀을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세력이 뉴딜 정책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대서양의 이쪽 가장자리(문맥으로 보아 대서양의 서쪽, 즉 미국을 뜻한다/역주)에서는 베버주의 전통이 더 강했다. 이 또한 노동 계급과 중간 계급 및 남부 농민의 동맹의 결과였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65년까지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빠르게 증가했고(연간 2.5 퍼센트의 비율로)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증대되면서 “아메리칸 드림”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미국이 다수의 미국인이 중간에 위치하는 중간 계급의 사회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부모가 그들의 자식이 자신들이 살았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라고 여기게 될 현실에 대한 반응이었고, 지배 세력의 관점을 항상 전파하는 주류 미디어에 의해 재생산되던 이해였다.

이것이 내가 1965년에 미국 땅에 발을 내딛던 때의 광경이었고, 그 해에 2백만 명의 이민자가 이 나라에 도착하여 합류했다. (나는 강한 스페인 억양과 스페인식 이름이 부정적 차별과 혐의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있는 커 화이트Kerr White 교수와 합류하기 위해 초청을 받고 그 해 8월에 도착했다.

미시간에서 온 오딘 앤더슨Odin Anderson 교수는 이미 그 때 의료의 분석에서 이론적으로 주도적인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저작에서(Health Care: Can There Be Equity? The United States, Sweden, and England, 1972), 미국이 중간 계급과 아메리칸 드림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미국에 대한 분석에서 결론지었다.


중간 계급은 과거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렇지만 자연 자원을 개발하고, 경제를 진흥시키는 기업, 기술, 그리고 경영 기법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른 시도들, 즉 예술, 교육, 보건의료와 국가적 명예와 팽창을 위한 전쟁 등에 넘치게 되는 사회적 잉여를 창출했다.


이러한 이론적 시나리오 속에 지배나 피지배 계급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심지어 지배 집단이나 엘리트도 마찬가지였다. 노동 계급과 같은 용어는 인용 부호가 새겨져 인쇄되었는데 이는 진지한 학문 분야의 포럼으로부터 배제되어야만 하는 이데올로그에 의해 사용되는 의심스러운 용어라는 점을 독자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그 당시에 계급, 노동 계급(계급투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그저 평범한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해서 삭제 당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떤 진지한 학자도 그로 인한 처벌을 우려해서 감히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학술 잡지의 편집자로부터 노동 계급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사회경제적 수준과 같이 덜 가치가 들어간 용어로 대치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 몇 통을 내 파일에 보관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변화가 단순히 의미의 개조 이상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흥미로운 지적은 Social Science and Medicine(당시 의료 사회학의 중요 잡지)의 편집자로부터 온 것인데, “노동 계급과 같이 고상하지도 못하고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을 삭제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같은 편집자로부터 동일한 지적을 받았던 다른 학자로 레이 엘링Ray Elling 교수가 있음을 알고 있다. (우연히 같은 잡지에 내 작업에 대한 극도의 신경질적인 리뷰가 권두 논문으로 나중에 출판되었다.) 계급에 대해서는 이견의 목소리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익 집단에 대해서는 있었다. 그들은 의료 기관과 임상에서 의료 전문직의 지배라는 결과로 의료가 처한 상황을 해석했다. 그들의 주요한 지적 준거는 전문직 지배 학파에서 최고의 이론가인 엘리엇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 교수였다. 병원을 해석하는 가장 급진적인 견해가 바바라 에런라이히Barbara Ehrenreich와 존 에런라이히John Ehrenreich가 집필한 Health PAC’s American Health Empire에 드러났는데, 그들은 일차적으로 의료의 확립이 의료에서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명예와 공적 인정이 항상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인물인 헨리 지거리스트Henry Siegerist의 제자들이었다. 특히 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에서의 내 경험은 지적 환경이 매우 이데올로기적이었고 계급 담론의 사용이 모욕과 차별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실제로 의료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 권력 관계에 대해 빈번하게 언급하면서 자신의 담론이 계급 담론이었던 한 지식인이 미국 지배층을 대변하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활동적이고 열정적으로 지원받았고,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으며, CBS 라디오 쇼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나는 당혹스러웠고 사실 부러웠다. 지거리스트가 경험했던 미국은 내가 경험했던 미국과 정말 달랐다! 그의 미국과 나의 미국 사이의 차이는 2차 세계 대전에 의해 고양된 민중의 기대에 대한 계급 반응인 매카시즘이었다. 그 목적은 사회로부터 미국 지배층의 특권을 축소하게 될 것에 대한 현실화와 이러한 기대를 확장시키기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발언자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왜 60년대 중반 무렵 미국에서 “수용가능”과 “지원가능”의 본질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화했는지가 설명된다. 그리고 왜 헨리 지거리스트와 그의 제자들이 매카시즘에 의해 대단히 야만적으로 억압받고 자신의 언어와 담론을 감춰야만 했으며 미국을 떠나야 했는지가 설명된다. 사실, 니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에 지거리스트의 제자 중 두 명인 밀턴 뢰머Milton Roemer 교수와 후에 절친한 친구가 된 레슬리 포크Leslie Falk 교수의 방문을 받았던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은 미국 사회의 의료에 대한 내 분석에서 매우 숨김없고 솔직한 점에 대하여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내게 그러한 개방성이 거부와 심지어 적대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에서 직접 파시즘으로 고통을 겪었던 나는 그들의 경고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매카시즘과 같은 지적 파시즘이 미국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파괴력이 내가 스페인에서 경험했었던 파시즘보다 더 악랄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미국에서 생활해온 32년 동안 여러 번 나는 밀턴과 레슬리의 경고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지배적인 반계급 시나리오는 내가 1965년에 도착했을 이미 그 당시 이론적 지형이었다. 그러나 억압은 저항을 부르게 되고, 이것이 1965년부터 1997년까지 계급과 건강에 대한 연구의 역사이다. 60년대와 70년대에 지적, 학문적 저항은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가능하였다. 50년대와 60년대 초의 보수성은 사회적 격동의 10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60년대의 소요에 의해 흔들렸다. 지적 창조성은 복종의 순간이 아니라 탐구의 순간에 일어나게 된다.

60년대의 역사적 기록이 학생들의 항의(실제로 미국에서 중심적이었고 다른 지역에 확산되었던 60년대의 많은 핵심적인 운동, 이를테면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프랑스 5월 항쟁)에 집중했던 반면, 실제로 노동 계급을 포함한 제 세력과 계급이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 5월 항쟁과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기간 동안 노동 계급이 집결하자 그 나라들은 마비되었다. 심지어 스웨덴에서조차 광산이 폐쇄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감동적인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혁혁한 민권 운동 이외에도, 우리는 또한 노동자 파업이 에너지와 수송 부문에 영향을 주었고, 닉슨 대통령이 노스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에서 광부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황을 보았다. 서방 국가에서 이러한 모든 노동 계급 운동의 공통 분모에는 단지 임금이나 보상 요구를 넘어서 건강과 삶의 질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놓여 있었다. 피아트 제조공장을 접수했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공장 전면에 내걸었던 슬로건에 잘 드러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동안 노래할 수 있는 공장에서 일하길 원한다.” 이는 노동 자체가 즐거움과 창조성의 원천이 되어야 하지, 그저 소비의 세계를 통해 창조성을 얻게 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계급의식이 있는 대다수의 노동자, 광부가  노동, 건강, 그리고 복지의 본질에 대하여 미국 역사에서 가장 거대했던 파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생산 세계에서 권력 관계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었고, 미국에서 지배적인 계급 관계에 도전했다. 이러한 권력 관계는 또한 민권 운동의 요소에 의해 위협받았는데, 미국에서의 구분선이 단지 인종뿐만 아니라 계급이라는 점이 곧 현실화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한 명인 바로 마틴 루터 킹이 민권 운동이 개입한 많은 문제가 실제로는 계급 문제였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살해당하기 불과 몇 주전에 “우리는 미국에서의 결정적 투쟁인 계급투쟁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지적했다(D.J. Garrow, FBI와 마틴 루터 킹, 213-215쪽, 펭귄 출판사, 1981에서 인용).


저항의 발전: 건강의 의료의 분석에서 계급적 접근


저항의 환경 속에서, 계급과 건강에 대한 연구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몇몇 사건들이 일어났다. 한 가지는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IJHS)의 창간이다. 세 명의 사람이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 에방과 존 브라더스톤 교수(두 사람 모두 당시 미국 학계의 극보수주의 분위기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주류 학계 저널에 발표되지 못했던 비판적 관점의 발표를 위한 포럼을 창설하도록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커 화이트 교수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전통을 계승한 캐나다 자유주의자이고, 기존 학문과 관습을 지독히 경멸했던 이단자적 신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학계의 모든 위치의 사람들에게 개방되도록 저널의 창간에 자신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학술 저널에 필요한 엄밀성을 갖추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커, 존, 그리고 칼 교수가 없었다면 저널이 발간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소장 학자이자, 비종신재직(nontenured) 조교수에 불과한 내게 포럼을 창설하도록 요청했다.

사회 정책, 정치경제학 및 사회학, 역사와 철학, 그리고 윤리학과 법학과 건강이 저널에서 다뤄질 분야에서 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대부분의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작업들이 IJHS의 페이지 속에서 시작되었다. 저널에는 계급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와 이론적 논의가 담기도록 했다.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IJHS의 페이지에서 자신의 지적 작업을 시작했고, 나는 흐뭇하게도 이 밤을 축하해준 두 명의 연자인 엘리자베스 피Elizabeth Fee 교수와 낸시 크리거Nancy Krieger 교수의 작업이 IJHS에 최초로 출판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심지어 요즘에도, 명망 있는 저자들이 다른 저널은 감히 자신의 결과를 출판해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는 자신의 논문을 IJHS에 투고하고 있다. 특징적으로(주류적 사고에 비판적인 미국의 대부분 포럼에서 일어나듯이), 저널은 미국에서보다 밖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부 연안 토론 그룹(East Coast Discussion Group), 이후 HMO


만연된 개인주의적 이해와는 정반대로, 나는 모든 지식 노동(육체노동뿐만 아니라)이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믿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에 이루어진 계급과 건강에 대한 연구의 막대한 지적 창조성은 3주마다 정기적으로 만났던 일군의 연구자간에 높은 생산적 교환의 결과물이었고, 볼티모어, 워싱턴, 그리고 뉴욕을 돌면서 계급, 건강, 그리고 삶의 질에 대한 연구에서 이론적, 개념적, 그리고 방법론적 문제를 토론했다.  미국 학계의 심각한 보수주의에 실망했던 우리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동부 연안 토론 그룹(ECDG)이라고 불렀던 지적 네트워크를 시작했다. 하워드 벌리너Howard Berliner, 롭 벌리지Rob Burlage, 바바라 버니Barbara Burney, 존 크로포드John Crawford, 로버트 크로포드Robert Crawford, 조 아이어Joe Eyer, 엘리자베스 피Elizabeth Fee, 샐리 것마커Sally Guttmacher, 제인 핼펀jane Halpern, 킴 하퍼Kim Hopper, 샌더 켈먼Sander Kelman, 데이비드 코텔척David Kotelchuck, 론다 코텔척Rhonda Kotelchuck, 조앤 루코닉Joane Lukomnik, 비센트 나바로Viscente Navarro, 힐리 리처드슨Hily Richardson, 렌 로드버그Len Rodberg, 잭 새먼Jack Salmon, 에번 스타크Evan Stark, 머리디스 터셴Meredith Turshen, 그리고 그레이스 치임Grace Ziem이 그 그룹의 창립자였고, 나중에 하워드 웨이츠킨Howard Waitzkin, 토마스 보덴하이머Thomas Bodenheimer, 리처드 브라운Richard Brown 등과 함께 태평양 연안까지 확대되었고 많은 분들이 오늘 청중으로 이 자리에 참석해있다. 우리의 지적 뿌리는 많은 비판적 전통에 놓여져 있었고 비록 그룹의 항상 발전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 일차적으로 계급 분석의 렌즈를 통해 건강에 대한 착취와 그 효과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의 관심사는 다른 차원에서의 착취와 지배에 대한 연구였다. 이로 인해 우리는 나중에 Health Marxist Organization(HMO)이라고 이름을 새로 붙였다. 10년 후에는 이 약자가 경영쪽에서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접수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우리가 이 약자에 대해서 저작권 등록을 해놓지 않은 점을 후회하고 있다!

이 그룹의 지적 생산성은 비상했다. 우리 중에 단지 몇몇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ECDG(후에 HMO)는 곧 꽤 큰 네트워크가 되었다. 우리는 60년대의 산물이었고, 우리의 초점이 집중적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이었으며, 우리의 지위와 관습에서 구속이 없었고(경우에 따라 마찰을 일으키는), 우리의 감정과 참가의 표현에서 억제되지 않았다. 많은 논문과 책이 그와 같은 지적 프로젝트의 산물로 드러났는데, 이러한 비판적 학풍 유형에 수용되었던 미국의 학술 저널 가운데 매우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인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로 나타났다. 또다른 저널이 American Jounal of Public Health였는데 내 논문인 “The Underdevelopment of Health of Working America”(Vol 66, 1976)를 포함해서 HMO에 소속된 일부 회원의 저작을 출판했다.

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에서 HMO에 의해서 촉발된 반응을 설명하는 일은 흥미롭다. 주류 학계 매체는 그 그룹의 비판적 지적 성과물을 애써 무시했다. 심지어는 1982년까지도, 전미 사회학 협회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학 협회가 그 그룹의 성과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74년, 1978년, 심지어 1982년까지도 정기 간행되는 State of the Art in Medical Sociology에서 우리 저작을 한 건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공연한 적대가 더 흔한 반응이었다. Social Science and Medicine (편집자가 내게 노동 계급과 같은 용어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사용하지 말 것을 충고했던 저널)은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우리 가운데 한 명(비센트 나바로)에 대해 독설과 생채기를 내는 모욕에 해당하는 권두 논문을 실었다. 그 저널은 나바로의 마르크스주의를 “질환(disease)”으로 정의 내렸고, 인간 해방이 그 질병의 박멸을 요청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Social Science and Medicine, Vol. 19, 1984. For a reply to that attack, Vol. 20, 1985를 보시오). 나는 저자가 육체적 박멸보다는 지적 박멸을 의미했다고 가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독설적인 논문으로 인해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였고 타국으로부터 온 우리 동료 중 한 사람인 하워드 웨이츠킨이 저널 이사회에서 사임하는 것을 촉진했다. 그러나 비판적 학자 간에 경계를 넘는 연대의 필요에 개의치 않고 그 빈 자리는 곧 채워졌다.

HMO에 의해 생산된 많은 작업이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한 형태로 유포되었다. 이러한 작업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가 우리의 저작에는 자극이 되었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지지했던 입장이 받아들여졌고(곧 보여드리고자 하는 바와 같이), 급진적이 된다는 것은 용기와 창조성을 가지는 것이고 당대보다 10년이나 15년을 앞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네트워크가 확립되자 두 개의 다른 반응이 나왔다. 하나는 Health PAC로부터였는데, 그들의 이론적 틀은 주로 전문직 지배 학파였다. 그들의 반응은 초기에 적대적이었으나 곧 상호 생산적 긴장 속에서 공동 연구로 대치되었다. 실제로, 가장 생산적이었던 HMO 회원 일부는 Health PAC에 투고함으로써 자신의 연구를 시작했었다.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또 다른 집단은 구 좌파 — 헨리 지거리스트의 제자들 — 였는데 그들은 우리의 투명성, 개방성, 그리고 (때때로) 상처를 주는 것, 그리고 이는 그들이 느끼기에, 종종 정확하게도, 우리의 건방짐을 불편하게 느꼈다. 우리를 방어하면서 나는 소수자(지적 소수자를 포함하여)가 발언하기 위해서는 더 크게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거리스트의 제자들 중 일부는 우리를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다른 제자들은 경계로 내몰려고 시도했지만, 대다수 — 특히 밀턴 뢰머, 조지 실버, 그리고 레슬리 포크는 대단히 — 는 활발하게 우리를 지지했다. 당시 종신 재직이 아닌 교수 신분이었던 회원들에게 그들이 보증하는 서한은 학회를 통해 우리가 가게 될 긴 여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계급과 건강에 대한 연구의 영역: 1965-1985


이 시기 동안 계급과 건강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는 네 가지 주요 영역이 있었다. 첫 째는 미국과 미국의 의료계에서 계급 관계의 분석이었다. 우리가 예측했던 바는, 금융 자본(보험 산업이 그 주요한 구성요소인)이 매우 지배적이고 노동계급은 매우 취약한 계급 관계의 유형 내에서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동학이 구성된다면, 금융 자본(당시에는 의료비 부담의 적은 부문만 담당했던)이 의료계에서 주요 동력이 될 것이고, 의료제공자로부터 자율성을 박탈하도록 강제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의료 전문직이 프롤레타리아트화 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큰 논쟁이 HMO 내부에서 발생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러한 예측 — 자본 축적의 논리(예를 들어, 의료계를 조직화하는 주요 동기로써의 최적 이윤의 논리)가 의료기관을 침범하게 될 것이고, 의료 전문직을 포함한 의료 제공자들이 자율성을 잃게 될 것이다 — 이 비영리 기관이 의료의 주요 동력이었고 의료 전문직이 거의 전능한 것처럼 보였던 그 당시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현실에서 계급 분석이라는 우리의 방법이 효력과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20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의료의 민간 기업화(corporatization)라고 부르는 일이 미국에서 현실이다. 보험회사에 의해 주도되고 의사가 이윤 추구 기계 내에서 단순히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 수퍼마켓 의료가 우리 시대에 의료의 경향이다. 많은 학계의 비판자들이 당시에는 우리가 부적절하고, 편집증적이고(paranoid), 또 너무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어떤 이론적 틀도 미국 의료를 이해하는 데에 그렇게 강력한 것으로 입증된 것이 없었고 그 분석의 중심에 계급 관계를 위치시키게 되었다.

연구의 두 번째 영역은 건강과 의료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의 탐구 목적은 어떻게 계급 지배 — 계급주의(classism) — 가 과학적 의료 지식, 의료 기관과 임상 의료에서 나타나는 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 — 의료에서의 계급주의의 이해 — 는 많은 이유에서 중요하였다. 하나는 의료에서의 지식, 기관, 그리고 임상을 계급이 없는 것으로 봤던 의료에 대한 주도적 이해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계급 없는 의료를 위한 투쟁이 중립적이고 무계급적 산물이나 지식의 배분을 개선시키도록 축소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계급 없는 사회(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의료의 본질 — 의료의 배분만이 아니라 생산 — 을 변화시키는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의료를 위한 전장을 국가 개입을 통한 의료의 더 나은 배분으로 제한시켜왔던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전통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비록 이러한 노력에 대해 지지와 박수가 있었지만, 우리 중 일부는 이러한 접근이 불충분하고 때때로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나는 계급적 관점에서 영국의 NHS(처칠이 영국 복지 국가의 왕관에 박혀 있는 보석이라고 정의했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도로 ‘계급 투쟁, 국가와 의료: 영국 NHS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책을 썼고, 훌륭했지만 영국 노동 운동의 이러한 성취가 의료 기관 내의 권력 관계(그리고 그것들이 결정짓는 위계 질서)의 유형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고 보였다. 나는 또 소비에트 의료에 비판적인 고찰인 ‘소련에서의 사회 보장과 의료: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써서, 소비에트 연방에서 생겨나고 있었던 새로운 계급이 착취 세력이 되었음을 — 이후 1989년 사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보였다. 이 책을 쓰자 지거리스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상당한 적대가 표출되었다. 익명으로 남게 될 그들 중 한 명은 내게 말거는 것을 중단했고, 이는 나에게 커다란 고통과 슬픔이 되었다.


계급과 건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의 세 번째 영역: 유물론 역학


HMO의 연구 중 많은 것들이 계급과 의학 및 계급과 과학적 지식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 중심을 두고 있는 반면, 세 번째, 매우 중요한 차원은 계급 관계와 건강 사이의 관계의 분석이었다. 이 연구들은 우리 인구집단의 건강 양태와 수준을 형성하는 사회적 맥락의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다. HMO는 우리 사회에서 자원의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파헤쳤다. 우리는 다른 관계들이 이해되고 상호관련 될 수 있는 원천으로서의 이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연구들을 보다 널리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너무 비특이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 사회 역학보다는 유물론 역학으로 말하기로 선택한 이유이다. 사회는 단순히 그것들 사이에서 무작위적으로 관계를 가지는 변수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계급 관계가 결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변수들이 인구집단의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가장 잠재적으로 조절하는 사회 계층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것들이 사회의 생산과 분배의 물질적 관계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인종, 성, 민족이 우리 사회의 건강과 복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연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건강에 관한 이 변수들의 영향을 계급 관계가 그 안에서 그러한 변수들이 그것들 자체 사이에서 및 건강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관계의 행렬의 부분으로서 분석했다. 우리는 계급 환원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강 수준과 의학의 양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계급의 엄청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 관계들에 관한 우리의 조사에서 우리는 불충분하거나 틀리게 생각하는 선형(linear) 실증주의적 사고(현실을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 형태의 분류 — 예를 들어 계급 아니면 인종 — 로 나누는)를 발견했다. 현실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변증법적이다. 남부의 35세의 흑인 여성 블루칼라 노동자는 완전히 동시에 흑인이며, 여성이며, 육체 노동자이며 남부인이다. 한 특성은 다른 것들에 파묻혀 있다. 그녀는 30% 흑인이고, 30% 여성이며, 30% 노동자이고 10%는 남부 출신인 것이 아니다 — 이 변수들 사이에는 선형적이 아닌 변증법적인 관계가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하에서는 계급 관계는 다른 관계들이 관련을 맺는 행렬을 구조적으로 정의하는 관계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인종이나 성과 같은 다른 변수들은 특정한 맥락과 연접 내에서의 계급보다 연계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계급은 항상 존재하며 많은 경우에 다른 변수들이 관계를 맺는 틀을 조직한다. 이는 왜 자본주의하에서 사망의 계급차가 사망의 인종차보다 일반적으로 더 큰가를 설명한다. 내가 Lancet(Vol. 336, 1990)에 기고한 글에서 보였듯이 심혈관계 질환 사망률은 백인 남성에서보다 흑인 남성에서 1.8배 높으나, 기업 변호사에서보다 블루칼라 노동자에서는 2.4배 높다. 계급은 미국에서 (대부분의 원인에 대해) 사망률과 이환율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막강한 변수이다.

계급이라는 용어가 금지된(그리고 연방 정부 사망률 통계가 인종 및 성별에 의해서는 출판되나 계급에 의해서는 되지 않고 여전히 그러한) 사회에서 이 현실이 어떻게 감추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러한 사망률과 이환율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계급 내에서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를 탐구하고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보다는 사회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초점은 단지 개인에 관하여보다는 우리의 사회 내에서 개인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위치하는가, 어떻게 그들이 다른 이들 및 그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가에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역학적 연구에 대한 비판은 그것들이 사망과 질병의 원인으로 개인의 특성 — 개별 위험 요인(individual risk factor)이라고 불리는 — 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 역학도 개인의 건강에 대해 수입, 교육, 주거, 직업 기타 개인적 특성과 같은 특정한 변수들의 영향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 중 다수도 그러한 연구에 기여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이 있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개인의 집합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 초점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구집단의 건강 수준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탐구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삶과 죽음에서 (계급, 인종, 성에 대한) 착취 및/또는 지배 관계가 어떻게 연관되고 재생산되고 구체화되는지를 분석했다. 예를 들어 우리 중 일부는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계급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것들이 노동자와 주민의 복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다른 이들은 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가족 내에서 재생산되는 계급과 성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들이 그 구성원의 복지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가족에 주목했다. 또 다른 이들은 경제적 순환의 원인과 그것들이 우리 시민의 사망률 및 이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뒤돌아볼 때, 나는 우리의 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적 및 직업적 계획 — 유물론 역학 — 의 주된 목적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믿는다. 최근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사망률과 이환율의 다양성을 설명하기에 개별 위험 요인이 불충분하다는 인식을 보아왔다. 요즘 연구들은 이 개별 요인이 이 다양성의 작은 부분만을 설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또한 최근에 국가내 및 국가간 사망률의 차이의 원인을 탐구하는 가장 약속된 길로 사회적 유대 — 우리는 이것을 연대(solidarity)라고 부르곤 했다 — 를 주목하는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 교수 같은 영국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생산과 건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 연구의 계승자인 로버트 카라섹Robert Karasek, 제프 존슨Jeff Johnson, 엘런 홀Ellen Hall 같은 현 세대 학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는 것을 보아왔다.


계급과 건강 사이의 관계에 대한 네 번째 차원: 제국주의와 건강


60년대와 70년대에 국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평적 분석에 사용된 가장 중요한 이론적 틀은 세계가 남부(개발도상국)가 북부(선진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HMO는 이 분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남부와 북부는 모두 계급을 가지고 있고, 그런 계급 관계의 분석은 세계에서 빈곤의 재생산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이 지역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민중이여 단결하라(Unidad Popular)’의 고문으로서 나는 칠레에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힘이 자본주의 소수독재 정치가들과 중상 계급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피노체트의 파시스트 쿠데타에 권력을 부여한 것도 이 그룹들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 정부도 이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대 칠레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정부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미국 기업 세력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수행한 것은 칠레의 자본주의자 및 농업 기반 소수독재 정치가, 그리고 중상 계급이었다.

따라서 계급 및 계급 관계는 또한 국제 관계와 그것의 건강에 대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이해는 우리 중 몇몇이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후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동료들과의 협조 하에, 이 지역에서 일하는 전 세계의 연구자 및 학자의 비공식 그룹으로서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Health Policy를 설립하는 기초였다. 이 국제적 전문 협회는 다른 것들보다 오늘날 세계에서 불평등의 놀랄 만한 증가와 그것의 건강에 대한 영향을 꾸준히 보고하고 고발해왔다. 그리고 협회는 미국 및 다른 선진국 정부에 의한 재정적 의존으로 인해, 오늘날 세계의 불평등의 진짜 원인 — 세계 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 기구에 의해 재생산되며, 세계 인구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 국가내 및 국가간 계급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방해하는 세계보건기구 및 다른 국제 기관에 의해 재생산되는 기술관료적 담론을 비판하는 몇 안 되는 국제 기구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구들이 다수의 복지 비용에서 최상층 소수에게 유리한 사회적 긴축재정 및 구조 조정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고통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이다. IJHS의 많은 논문들에서 보이듯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옹호되는 보건 서비스 기금과 연금 프로그램의 사유화의 심화 제안(이에 대해 세계보건기구는 침묵하고 있다)은 대중 계급을 뚜렷하게 해치고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그들이 옹호하는 공격적인 재정 정책과 함께 현재 세계 건강 문제의 뿌리인 수입과 부의 불평등 증가의 주된 원인이다.


80년대와 90년대의 계급과 건강에 관한 연구들


80년대와 90년대의 계급과 건강에 관한 연구들은 일차적으로 몇 개의 주된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한 영역은 60년대와 70년대에 HMO의 계급 분석에서 예언된 현상, 즉 의료의 기업화의 결과이다. 의료 영역에 이윤을 추구하려는 동기의 침입과 의학 연구소에서의 인도력으로서 사업적 행동은 우리 인구의 건강과 복지에 주된 위협이 되어왔다. 잭 살롬Jack Salom, 데이빗 힘멜스틴David Himmelstein, 슈테피 울핸들러Steffie Woolhandler 및 우리 전통의 다른 계승자 같은 비판적 저자들뿐 아니라 주류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침투의 잘못된 영향을 보고하고 고발하는 매우 훌륭한 논문들이 출판되어왔다. (다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 그러한 침투를 예견했던 우리들에게 이 사건은 지적인 만족감을 주었지만(우리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우리가 틀렸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거의 무력하게 우리는 의료에 대한 기업의 침투 —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대미문의 미국 내 기업 계급의 막강한 권력과 노동자의 엄청난 취약성의 결과 — 를 목격해야 했다. 권력은 사실상 상대적인 개념이다. 한쪽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그 반대쪽이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에서도 사실이다.

우리의 예견이 옳은 것으로 증명된 또다른 영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였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지적하지 않을 때 그 나라에서 사회적 관계가 변할 것이라고 보았다. 내가 전에 지적했듯이 우리는 새로운 계급이 명백히 그들 자신의 이익을 최적화하기 위해 국가와 생산 수단을 통제하기 때문에 소련을 비판했다. 우리는 계급 분석이 또한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데도 타당하다는 것을 보였다. 의료 내의 위계적 관계(그리고 그것들이 수립한 우선 순위)가 변화(다른 유형의 우선 순위 수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단순히 원래 그들을 형성했던 계급 관계를 재생산한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로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경험적 자료는 그러한 결론과 모순된다. 다른 형태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계급을 감소시킴으로써 계급 없는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정치적 계획들 —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민주주의나 개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적 사회주의 같은 — 은 대부분에서 20세기에 그들 인구의 건강과 복지 수준 향상에 (불평등을 유지함으로써 계급 관계를 유지해버린) 그들의 반대자들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20세기 동안 각 대륙에 대해 이러한 경험의 분석이 오늘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보여 왔다. 선진국에서,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1950년대 이래 시민의 건강 및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미국 정부 — 첫 번째 고려가 계급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연한 계급 관계를 재생산하는데 있었던 — 가 그 시민을 위해 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업적을 보여 왔다. 40년대와 50년대에 그들 나라의 (건강 지표를 포함한) 복지 지표가 미국의 것보다 나빴음에도 스칸디나비아와 서유럽 국가들에서 이러한 개선이 일어났다. 개발도상국 중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중국은 인도에 비해 훨씬 나쁜 인구 지표를 가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훨씬 좋은 지표를 가지게 되었다. 만일 인도가 70년대 동안 중국과 동일한 영아 사망률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도는 매년 400만의 어린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 내에서 가장 좋은 보건 지표를 가지고 있는 주인 케랄라Kerala는 계급 없는 사회를 천명하는 정치력에 의해 통치되어왔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쿠바는 유사한 수준의 경제 발전 수준에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나은 보건 지표를 달성해왔다.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성공의 길을 덜 보여준 것은 동유럽에서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40, 50, 60년대의 극도로 어려운 기간 동안에 보건 부문 안팎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차 대전 동안 나치즘을 물리치는데 대한 결정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은 50년대와 60년대 동안 대단한 비율로 자원의 분배를 향상시켰다. 최소한으로 말해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소련의 붕괴를 축하했던 동일한 힘이 이전의 소비에트 국가들에서 건강 상황의 붕괴, 즉 이 힘이 조장했던 자본주의 모델의 도입으로 인해 있었던 붕괴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유사한 과정이 요즈음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는 그 사회에 대한 (좌파로서) 나의 비판 때문에 소련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언되었다. 그런데, 좌파로부터의 비판이 아니라 우파로부터의 비판이 그 사회에서 용인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소비에트 체제가 진화시켜온 형식(이는 그람시에 의해, 또한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분명하게 예견되었다)에 대한 나의 반감과 혐오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전 소련의 민중들의 삶을 훨씬 열악하게 만든 자본주의적 대체자들에 의해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가 얼마나 축하받는지를 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이 나라들에서 기대 수명은 뚜렷하게 감소해왔다. 그리고 소비에트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노멘클라투라의 계승자인 마피아(보건의료 마피아를 포함한)들이 이제 이 나라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러시아에 가장 정통한 미국 존스 홉킨스의 역사학자인 다니엘 토즈Daniel Todes 교수가 언급했듯이, “마피아는 그 체제의 기형이 아니다. 마피아는 그 체제의 가장 유력한 권력이다.”

전적으로 20세기의 경험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보다는 동일한 것으로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볼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계급 없는 사회를 천명한 잘 의도된 정치 권력이라면, 그들은 똑같이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민주적인 절차를 수립할 것을 천명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어떤 형태의 억제도 없는 상태로 우리는 세계의 불평등의 증가와 건강 조건 악화의 주 원인인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인 확산을 목격하고 있었다. 놀랄 것도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 오늘날 유력 계급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프로젝트인 — 는 계급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 대신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업적인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각 개인으로서 개인을 변화의 동력으로 본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 최근에는 다른 입장들도 계급 관계의 중요성을 부정해왔다. 한 입장은 자본주의(또는 실제로는 어떤 다른 사회 체제건)의 본성과 자본주의하에서 계급 관계의 중심성을 총화하는 것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계급은 스스로 희석되고 결국은 사라지며, 독립적인 해방을 요구하는 다양한 다른 사회 운동에 의해 대체된다. 이 이론적 틀은 미국의 정체성 정치학에서, 계급이 두 번째 줄을 차지하며 많은 경우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비평 전통 내에서 특히 강력했다. 그러나 이 입장의 등장은 결백하지 않다. 그것은 계급 담론과 현실이 강하게 억압되는 공식적 담론에 의해 선호되었다.

나는 그러한 설명의 증거를 계급, 인종 및 건강 사이의 관계에 관한 나의 논문을 Lancet에 출판하는 것을 둘러싼 사건들에서 보았다. 그 논문에서 나는 (a) 계급별 사망률의 차이가 인종별 사망률의 차이보다 크다, (b) 인종이 아니라 인종주의가 미국에서의 인종별 사망률 차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 인종주의는 흑인의 대다수를 계급 구조의 더 낮은 계층으로 밀어넣는다 — 는 것을 보였다. 인종별 사망률의 차이는 따라서 유전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Lancet에 그것을 출판하기 이전에 JAMA와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제출했었는데, 둘 다 내가 노동자 계급이 상위 계급보다 더 높은 사망률과 이환율을 가진다는 것을 보였지만, 사람들이 더 높은 질병의 비율을 가졌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저널들은 사회적인 것이 생물학적인 것을 결정하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을 결정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정말 주목할만하다! 나치즘이 그런 독트린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이제 찰스 머리Chales Murray 및 현재 사회 질서를 생물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Lancet은 나의 논문을 바로 받아들였으며, 나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미국은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과 함께 그것을 출판했다.

이 논문의 출판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묘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미국은 계급에 따른 사망률 통계를 공표하지 않는 매우 적은 선진국 중의 하나이다. 연방 정부는 사망률 통계를 인종, 성, 연령, 지역 그리고 민족에 따라 공표하지만 계급에 따라서는 하지 않는다. 나의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당시 미국의 보건 장관이던 설리번Sullivan 박사(부시 내각의 유일한 흑인)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내가 논문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사망률 통계를 인종 및 계급에 따라 발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라고 질병통제센터(CDC)에 지시했다.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인종주의가 중요한 것이다 — , 그리고 그것이 (다른 요인들 중에서) 계급을 추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에 단지 인종에 의한 통계 발표는 오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CDC는 백악관의 국내정책 위원회로부터 그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지시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1990년에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여러분께 정중히 물어보겠다. 왜 미국의 권력기구는 우리 사회에서 계급 분석과 계급 담론에 대해 그렇게 강하게 반대하는가? 왜 우리는 미국이 사실 계급 사회라는 압도적인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사회로서의 미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비과학적인 인식의 재생산을 보아야 하는가? 1997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62%가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으로 인식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1988년 대선 동안, 내가 제시 잭슨(Jesse Jackson) 목사의 수석 보건 고문으로 있을 때 나에게 명백하게 다가왔다. 나는 1984년, 그가 아메리칸 드림으로부터 배제된 소수자의 대변인으로 출마하기를 선택한 이래 그의 고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양심으로서, 주변인의 대변인으로서 출마했다. 나는 미국 지배층의 주된 기관들로부터 그의 1984년 선거운동에 들어온 많은 동정을 보았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는 잭슨 목사의 선거운동을 매우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

그러나 1988년에 잭슨 목사가 계급 후보로 돌아왔다. 그는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그들이 모두 백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사들과 가진 것보다 그들이 모두 노동자이기 때문에 흑인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노동자 계급의 결집을 솔직하게 호소했다. 그리고 사실 사망률과 이환율 양상은 잭슨 목사가 완전히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1988년에는 미국 지배층들은 엄청난 적대감을 가지고 대응했다. 뉴욕타임스는 잭슨 목사가 그러한 형태의 담론을 가지고 국가를 파괴하려 한다고 고발하는 극도로 적대적인 사설을 발표했다. 그의 고문들은 그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 내의 중심적인 갈등을 계급으로 정의한 직후에 마틴 루터 킹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했다. 나는 미국의 지배층이 의심할 여지없이 지배층의 계급적 특권을 줄일 계급 프로젝트를 둘러싼 노동자 계급의 결집에 대해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내에 계급 담론의 부재가 정확히 이 나라에 엄청난 계급 우월성이 있다는 가장 좋은 지표가 된다.

나는 미국 지배층이 나와 나의 일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에서 또한 그 증거를 보아왔다. 만일 내가 그들의 규칙에 따라 사는, 라틴 아메리카계(나는 이를 자랑스러워한다)였다면 나는 아마도 나의 많은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지배층이 줄 수 있는 온갖 명예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 규칙에 맞게 살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모든 작업에서 나는 계급을 강조해왔고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봉사하려 노력해왔다. 사실 내가 직면한 적대는 내 주장의 가장 좋은 증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오늘날 계급에 대한 관심의 중흥을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보겠다. 우리 민중의 물질적 현실이 그 이유를 보여준다. 미국 지배층의 승리에 도취된 담론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현실은 이 나라(그리고 세계)의 노동 민중의 대다수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 종료 후 처음으로 더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의 부모들이 더 좋은 상황에 있었음에 비해 그들의 아이들이 더 나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상황과 함께 우리는 미국 사회의 뚜렷한 극화를 목격하고 있다. 1974년에 최고경영자의 수입은 노동자 수입의 34배였다. 그러나 1994년에 그것은 179배로 커졌다! 보건 부문에서 우리는 건강 보장 적용 범위에 있는 사람의 수가 감소하는 것을 보아왔다. 최근의 복지 기금(Commonwealth Fund) 보고서에 따르면 5200만 명의 사람들이 각 해의 어느 시간에 건강 보험이 없다! 이런 극화는 동시에 소수자들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흑인과 히스패닉 중류 계급의 규모가 상당히 증가하는 것을 보아왔는데, 이는 인종에 기원한 소수자/여성 고용촉진 계획의 도움으로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린 결과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인종 및 성 차별에 반대해야 하므로 그러한 반차별 프로젝트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인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의 광범위한 다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훨씬 필요한 프로그램들과 혼돈하지 말자. 예를 들어 흑인 중류 계급의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흑인 노동자 계급의 자유재량 수입은 감소해왔다. 사실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William Julius Wilson 교수가 보여줬듯이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들 사이의 사회적 극화는 백인들 사이에서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백인의 상위 20%가 전체 백인 수입의 44%를 차지하는 반면, 흑인의 상위 20%는 전체 흑인 수입의 49%를 차지한다.

노동 계급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그리고 백인의 삶과 복지를 향상시킬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 중간 계급에 이익을 주는 계급 기반 프로그램 — 즉 완전 고용 정책이나 국가 보건 프로그램처럼 모든 노동자, 특히 소수자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프로그램 — 을 따르는 것이다. 공공 정책은 따라서 (인종 및 성뿐만 아니라) 계급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보건 부문에서 이 계급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1. 우리의 정부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인종 및 성뿐만 아니라 계급 — 나는 사회경제상태(socioeconomic status)나 베버의 기울기(gradient) 범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적인 계급 범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 에 대한 정보를 발표하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는 것. 이것은 정부가 이미 수집하는 정보를 가지고 할 수 있다.

2. 국가 내의 계급 불평등 상태를 감시할 미국 대통령 위원회(영국의 흑인 위원회나 다른 나라들의 수많은 위원회들 같은)를 설치하는 것. 나의 학생 중 한 명인 리사 밀러 샬릭Lisa Miller Schalick의 탁월한 박사 논문은 미국에서 계급별 사망률 차이가 얼마나 증가하고 있는지를 보였다.

3. 우리의 정부가 계급 구조의 변화를 우리 인구의 보건 및 복지와 관계 짓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인프라의 발전에 관한 IJHS에 발표된 애너폴리스 국립보건연구소 회의(Annapolis NIH conference)의 권고를 이행하는 것.

4. 우리 정부의 보건 정책의 최우선 순위중 하나로 계급 및 성에 따른 차이뿐 아니라 계급별 사망률 및 이환율 차이의 감소를 설정하는 것.

5. 소수자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권 프로젝트를 계속하되,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

a. 생계 급료를 포함한 완전 고용이나 국가 보건 프로그램 같이 우리의 노동자 및 중간 계급의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보편적인 사회권 — 인종 중립적인 — 프로그램을 확립한다.

b. 국내외에서 오늘날 세계의 불평등 증가를 자극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중단한다.

c. 무역을 포함하여 세계 인구의 사회권 및 시민권에 관한 대외 정책의 영향을 평가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인구의 보건과 복지를 향상시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제안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실행할 수 있지만 우리의 정부가 우리 노동자 — 우리의 정치적 관례로부터 너무나 많이 소외된 노동자 계급과 대중 계급의 요구와 필요에 대해 현재 책임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미국에서 계급 문제에 대한 관심의 증가나 현재 미국 노동 운동에서 일어나는 훌륭한 변화와 같은 변화에 대한 충고가 이 나라에서 개혁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여러분, 학자와 연구자와 노동자들을 이 운동을 돕고 뒷받침하기 위한 지식의 생산에 초청한다.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게 몇 가지 언급을 함으로써 마치려 한다. 여러분은 정치 및 학술 기구들이 약간 더 계급 문제(아직 계급 담론은 아니지만)에 신경을 쓰게 된 시기에 일을 하게 되어 운이 좋은 셈이다. 역사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미국 같은 곳에서 여러분이 지금 추수하고 있는 들판에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 덕택에 이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 세대를 포함하여 많은 다른 사람들은 금지된 질문을 던질 책무를 다하고 높은 대가를 치렀다. 생명을 잃었고(우리 모두는 에릭 홀츠먼Eric Holzman을 그리워한다), 취직을 거부당했고, 정치적 압력 때문에 교수직과 직책을 빼앗겼다. 우리의 현실 참여 때문에 종신 재직권은 결코 용납되지 않거나 크게 미루어졌다. 새로운 세대로서 여러분은 너무 오랫동안 침묵되었던 이런 현실을 알아야 하며 잊혀지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이런 역사를 알아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의 연속성을 확립해야 한다. 나는 내가 그 역사에 기여해왔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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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 업저버 임솔 기자와 개인적 인연으로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발간 기념 인터뷰를 했다.


원문 기사: "의사들이여, '계산맹에서 벗어나자" 숫자에 속지 않고 올바르게 위험소통하는 방법


#1. 여성의 유방암 발생 확률은 0.8%이다. 유방암에 걸렸을 경우 유방촬영술에서 양성이 나올 확률은 90%이다. 유방암에 걸리지 않더라도 유방촬영술에서 양성이 나올 확률은 7%이다. 한 여성이 유방촬영술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면 실제로 유방암에 걸렸을 확률은 얼마일까?


#2. 1000명 중 8명의 여성이 유방암에 걸린다. 8명 중 7명에서 유방촬영술 검사결과 양성이 나온다. 유방암에 걸리지 않은 992명 여성 중 70명에서도 유방촬영술 결과 양성이 나올 것이다. 유방촬영술 양성 중 얼마나 많은 여성이 유방암에 걸렸을까? 


#3. 양성이 나왔지만 실제 유방암은 아닌 ‘위양성’ 여성들은 양성을 통보받은 순간 마치 일생이 끝난 것처럼 받아들인다. 1번과 2번에서 위양성 수치를 어떻게 계산할까? 또한 의사들은 이들이 고통 속에 빠져 있지 않도록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확률로 계산한 1번은 계산이 복잡하고 계산 자체가 하기도 어렵다. 자연빈도로 계산한 2번은 7명으로 쉽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번의 계산도 마찬가지다. 또한 3번에 해당하는 70명의 여성들은 실제 유방암이 아니라고 최종 진단될 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의사들의 정확한 설명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같은 내용을 담은 책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저자인 게르트 기거렌처(Gerd Gigerenzer)는 흐릿한 생각을 막고 복잡한 계산을 피해 ‘계산맹’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준다.


특히 의료인의 계산맹은 환자들에게도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책임감있는 번역에 동참하면서 ‘의료인의 계산맹 탈출 도우미’를 자처한 인하의대 사회의학교실 황승식 교수<사진>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어봤다. 


-저자인 게르트 기거렌처에 대해 소개해달라.


게르트 기거렌처는 막스플랑크협회 인간개발연구소장을 오랫동안 맡고 있는 인지심리학계의 거장이다. 심리학 관점에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설명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 카네만, 고 아모스 트버스키와는 학문적 라이벌 관계다. 독일 학자라는 이유에서인지 국내에는 소개가 부족했다. 지난 2008년 ‘생각이 직관에 묻다(Gut Feelings)’는 저서가 번역된 이후 2번째 번역본에 불과하다.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원서인 ‘Calculated Risks'는 200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까지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어 이번 번역에 참여하게 됐다. 본인 역시 그의 책을 읽고 확률이 아닌 자연빈도로 위험을 말하는 방법을 배웠다. 향후 기회가 된다면 기거렌처가 책임 편집한 의료인을 위한 책 ’Better Doctors, Better Patients, Better Decisions: Envisioning Health Care 2020‘도 번역해보고 싶다.


-책을 통해 숫자, 확률에 빠진 대다수 의료인이 ‘계산맹’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확실성의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에 따르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밖에 없다. 불확실성을 알고 정확하게 위험을 계산해 의사소통을 하는 ‘위험소통’을 일깨우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의사가 환자들에 의사를 전달할 때는 보통 확률로 표현한다. 그러나 백분율, 퍼센트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만약 ‘내일 비가 올 확률’이라면 정확히 어떤 확률을 말하는 것일까? 예년과 같은 조건, 습도, 온도일 경우 내일 비가 올 확률이 50%가 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적 요인인지, 본인이 비를 맞을 확률인지 등 확실하지 않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인구집단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 예방의학 전문가는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지만, 개별 환자들에 결과를 적용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매순간 위험소통 상황에 직면하는 임상의사들이 알아두면 좋을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국가검진이 의무화되고 검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위험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더욱 많아졌다. 앞의 사례에서처럼 수검자들에게 위양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의사들이 확실성의 환상을 갖고 있다. 고가의 장비로 진단하면 마치 모든 질병을 다 알아낼 것처럼 이야기한다. 검진의 이득을 부풀려 표현하다 보니 ‘양날의 검’처럼 의사들에게 다시 칼날이 향하고 있다. 검진결과 양성이지만, 사실은 양성이 아닌 ‘위양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반대로 검진에서 음성이 나오더라도 실제로 질병이 있는 ‘위음성’일 때도 있다. 흐릿한 판단과 의사소통으로 책임을 떠안고 법적 소송마저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부러 과장할 필요는 없더라도 검진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검진의 이득을 설명하되, 양성이 나왔을 때와 실제 질병이 됐을 때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현재 대형 검진전문병원들은 그저 백화점식 검진을 통해 질병 조기 발견의 확신만 심어주고 있다. 고가의 검진을 부추기기보다는, 주기에 맞춘 반복된 검진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의사 입장에서 검진의 정확한 정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정보 제공에 앞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검진을 실시하는 질병에 대한 유병률과 검진에 활용되는 검사의 민감도 및 특이도 관련 자료는 이미 나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검진기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연령별 양성 예측도 결과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물론 개별적인 임상 상황의 의사소통에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직관과 경험에 의존해야 할 때도 많다. 그러나 소아 성장곡선처럼 한 번 만들어두면 쉽게 뼈대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동시에 의사들도 검진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검진은 분명 수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모든 질병의 조기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가의 검진을 하더라도 발견하지 못하는 질병이 있기 마련이고, 이에 따른 소송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수검자들에 검진 시 방사선 피폭 선량을 설명해야 할 수도 있다.


이처럼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사전에 잘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위험소통 과제가 될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검진은 실시되고 검진기록도 남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으로는 검진의 질 관리가 더욱 필요한 이유가 된다. 


-실제 상황이 닥치더라도 수검자에게 위양성의 사실을 알리기 쉽지 않다. 자칫 검진의 득보다 실을 더 크게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진과 진단은 분명 별개 문제다. 아무런 증상이 없을 때 질병을 알아내기 위한 수단이 검진일 뿐이다. 건강한 사람에서도 위양성, 위음성 결과가 흔히 나올 수 있다. 단지 이 사실을 잘 아는 의사들이 수검자들보다 먼저 이야기해야 할 뿐,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의사들은 굳이 사전에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검진의 이득을 설명하는 시간조차 모자란다고도 한다. 검진센터 외에는 일반인 수검자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병원에 오기 전 이미 위양성이 확인된 만큼, 의사들은 더욱 확실성의 환상에 빠지기 쉽다. 수술 받고 좋아지는 환자가 있는 반면,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 과정에도 관심 가졌으면 한다.


-현재 정확한 위험소통 방법이 의대 교육에 반영돼 있나? 이제서야 겨우 의사국시 실기시험에 환자와의 소통 항목이 반영된 상태다.


통계학 교육을 포함한 위험소통 교육과정은 전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시드니의대, 맨체스터 의대 등에서 시범적으로 운영 중이다. 많은 의대에 의학통계학 과목이 개설돼 있지만 이론적 강의 위주로 가르칠 따름이다. 의사들 모두가 연구에 전념하진 않는 만큼, 통계 분석을 깊게 배울 필요는 없다. 통계를 해석하고 이를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인하의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습시간에 교육하고 있다. 위험소통을 배운다면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유용하리라고 본다. 검진은 물론 수술, 약물 처방 등의 효과를 정확히 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의료계의 계산맹이 사라지고 위험소통의 인식이 확대될 경우 기대효과는 무엇인가? 의사 이외에도 관심가져야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의사와 환자의 ‘라포’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인 기거렌처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의사가 환자에 단순히 ‘시키는 대로 하라’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해야 한다’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술지 편집인, 제약회사, 언론 등에서도 배울 필요성이 있다. 해석하는 수치가 다르고 통계 적용의 오류가 발생하면서 엉뚱한 근거자료가 제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가검진에도 반영돼야 한다. 국가검진의 품질을 높이고 정확한 통계 분석이 선행돼야 대규모 연구가 가능하다. 지금은 그저 실적, 영업을 위해 검진을 확대하다 보니 비교연구가 불가능하다. 국가 단위에서 검진을 책임지고 있는 질병관리본부, 국립암센터,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먼저 체계적인 검진통계를 산출해 위험소통에 나서고 민간기관이 따라간다면, 검진 본연의 목적인 조기 사망 예방에 훨씬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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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뉴스레터 76호에는 '허현회 현상'이라는 제목의 쪽글을 썼다. 새로 덧붙인 말은 거의 없고 기존에 했던 말에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몸에 좋은 카레' 해프닝과 벵베니스트, 웨이크필드, 트루도 등의 사례만 몇줄 붙였다.



 

허현회 현상


허현회라는 저자가 있다.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펴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활발한 트위터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여러 언론이 다루기도 했다. 책 내용은 의아함을 넘어 황당하다. 천연 알코올은 인체에 유익한 약이고, 천연 니코틴 역시 인체 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천연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H2O는 물이 아니고, 염화칼슘에는 나트륨이 98% 들어있으며, HIV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주장까지 읽다보면 필자가 온전한 정신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저자가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책 ‘들어가며’에 나와 있는 내용과 인터뷰 기사를 통해 짐작 가능하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큰 수술을 받았고, 40대 초에는 당뇨 진단을 받았으며, 비염으로 고생하다 어느 순간 모든 약을 끊고 식이요법으로 많은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 현대 의학을 수치에 맹종하는 신흥 종교로 몰아붙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셈이다. 책의 상당 분량이 의사를 무지와 탐욕에 젖어 시민을 상대로 마약 장사를 하며 부를 축적해가는 현대 의학이라는 종교의 전도사로 비난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저자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의학 서적을 뒤적이고 자료를 정리하면 할수록 현대 의학이라는 무지한 학문과 주류 의사라는 탐욕에 젖은 부류들의 허구를 깊이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장의 근거가 적절한 지 찾고 비판하는 일이 본업인지라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책 맨 뒤에 수록된 참고문헌을 본문의 주요 주장과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상상했던 수준 이상이었다. 참고문헌의 절대 다수는 현대 의학을 비난하는 외국 저자의 번역서에 대한 2차 인용이었다.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린 맥타가트, 2011년)였다. 통째로 가져온 대목도 보인다.


참고문헌 중 의사들의 주장도 찾아봤다. “초음파검사는 태아에게 유해한가?”(박중신, 대한의사협회지, 2008년)는 저자의 입맛에 맞게 문장을 짜깁기하여 마치 유해한 것처럼 써놨다. 참고문헌에 오타도 많고 인용 방법도 틀린 곳이 여러 군데며 찾아보기도 없다. 저자가 과학적 글쓰기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음은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타임지에 관절염을 카레로 치료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책에 싣고 트위터에도 올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평소 저자에 비판적이던 의사가 타임지 본문을 대조해 카레라는 단어는 있지도 않고 적절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으며 카레는 케어(care)의 오역임을 밝혔다. 참고문헌 목록을 통해 저자가 의학 자료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증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유사과학으로 무장한 자칭 의료전문가의 등장은 한국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물에 기억력이 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동종요법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 지에 실었다가 철회당한 벵베니스트 사례가 있다. 동종요법은 동식물이나 광물 등 천연물질을 사용하고 희석하므로 해가 없다고 주장하여 대체의학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동종요법의 과학적 효과는 이해 당사자의 발언과 개인의 경험 이상의 증거가 없어서 저자가 책에서 주장한 대목과 유사하다. 전직 외과의사인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MMR 백신과 자폐증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란셋’에 실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저널리스트 한 명이 백신 제조업체와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인 변호사에 의해 웨이크필드가 고용됐고 조작된 결과가 논문으로 발표됐다는 사실을 파헤쳤다. 이미 밝혀진 잘못된 주장 또한 저자의 책에 비판 없이 실려 있다. 케빈 트루도는 『자연 치료법: ‘그들’은 당신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책에서 각종 음모론을 주장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과 연방무역위원회의 제소를 받아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저자의 주장을 비과학적이라고 비웃기는 쉽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수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하기도 곤란하다. 의사 사회도 노이즈마케팅이 분명하므로 무시해야 된다는 의견과 일일이 반박하고 필요하면 법적 조치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나 대한의학회 차원에서 저자의 책을 포함해 문제 있는 주장이 실린 여러 책을 대조하여 꼼꼼하게 반박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소설 속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냈듯이 저자는 현대 의학이라는 신흥 종교에 감염된 의사라는 괴물을 베껴왔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한강의 괴물 생명체는 미군 기지에서 무단 투기한 포름알데히드가 만들어냈다. 저자 책 속에 등장하는 괴물 의사는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할 시간조차 없이 진료에 내몰리는 한국 의료 현실과 선정성에 굶주린 황색 저널리즘이 만들어냈다. 바람직한 환자-의사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대중들에게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언론에 노출되는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의사로는 제2, 제3의 허현회 현상을 막을 수 없다.


(새얼뉴스레터 2013년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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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24 서점에서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북티저 동영상을 만들어 책 판매 사이트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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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에 샤론 버치 맥그레인이 쓴 <불멸의 이론>에 대한 서평을 썼다. 저자의 목소리를 좀더 담아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대통령 당선자, 핵발전소 사고 예측…'절대 열쇠'는?

[프레시안 books]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불멸의 이론>

황승식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통계학 전공자가 아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구집단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예방의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했다. 각종 통계적 이론과 기법을 질병 자료에 적용하는 일이 주 업무인 관계로, 대학원 과정에서 통계학 관련 몇 과목을 수강했을 뿐이다. 물론 다른 의사보다 가설검정, 유의수준, p-값, 신뢰구간 등과 같은 현대 통계학 용어와 개념에 익숙한 편이다. 다양한 통계적 기법을 적용하다보니 개발 과정에 대한 역사를 흥미롭게 살펴보게 됐다. 요즘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가설검정에서 귀무가설 기각과 대립가설 채택이 현대 통계학의 두 거두 네이만과 피셔가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 <불멸의 이론 : 베이즈 정리는 어떻게 250년 동안 불확실한 세상을 지배하였는가>(샤론 버치 맥그레인 지음, 이경식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휴먼사이언스
몇 해 전 가을 학회에서 우리나라 지역별 건강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 직후였다. 어떤 분이 분석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답변을 마쳤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베이지언이세요?" 나는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자료 분석에 필요해서 쓰는 정도라고 얼버무리듯 답했다. 샤론 버치 맥그레인이 2011년에 쓴 <불멸의 이론: 베이즈 정리는 어떻게 250년 동안 불확실한 세상을 지배하였는가>(한국어판 이경식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2013, 이하 <불멸의 이론>)를 읽고 나니 그 질문은 독실한 기독교인의 "혹시 여호와의 증인 신도세요?"와 동급의 질문임을 깨닫게 됐다. <불멸의 이론> 본문 중 1970년대 베이즈론자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통계학과에 교수로 임용됐을 때, 동료 교수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과 같다"고 논평한 대목도 나온다.

<불멸의 이론>은 250년 전 영국 아마추어 수학자이자 비국교도 목사였던 토머스 베이즈가 발견한 베이즈 정리를 기반으로 한 통계 이론이 겪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약사다. 베이즈 정리는 필요에 따라 찾아 읽던 논문과 참고 서적에서 비교적 간단한 수식의 형태로 망막을 거쳐 갔을 뿐이었다. 베이즈 정리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최소한의 수식마저 피한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초기의 믿음을 객관적이고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할 때 개선된 새로운 믿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요약된다. 사실 베이즈 정리는 '우리 주변 세상의 증거에 기초해 과연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라는 종교적 논쟁에서 탄생했다.

1부 '탄생'은 베이즈 정리의 탄생과 최초의 수난을 다룬다. 토머스 베이즈는 자신이 발견한 정리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베이즈의 친구이자 편집자였던 리처드 프라이스의 저작을 통해서 간신히 알려지게 됐다. 베이즈 정리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손꼽히는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에 의해 재발견됐다. 여러 분야에서 모인 방대한 자료를 처리하기 위해 독자적 방법을 고안했던 라플라스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베이즈가 이미 발견한 정리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역사적 관습에 따라 베이즈 정리라고 부르지만, 후대 학문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베이즈-프라이스-라플라스 정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라플라스 사후 주관적인 믿음의 적용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베이즈 정리는 학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 해결에는 여전히 베이즈 정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2부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암호 해독 전문가였던 앨런 튜링이 독일 암호 체계 에니그마의 비밀을 베이즈 정리를 이용해 풀어 유보트의 이동경로와 위치를 포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과정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구소련의 수학자 안드레이 콜모고로프와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 역시 연합군의 포격 지점 지정과 음성 암호화 등에 적용해 베이즈 정리의 가치를 입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시작된 냉전으로 인해 베이즈 정리는 다시 봉인됐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법이 적국 진영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기에 관련 자료 대부분을 기밀 처리했던 것이다. 종전 50년이 지나 겨우 비밀이 해제된 문서도 있고, 아직 해제되지 않은 문서도 많다. 심지어 매카시 광풍이 불던 시기 미국의 한 통계학자는 자기 동료 한 명이 베이즈론자이므로 미국인이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는 오싹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3부 '부활'은 금지된 이론인 베이즈 정리가 냉전 시기에 군사적 필요에 의해 부활하게 된 역설을 다룬다. 베이즈 정리는 자료가 많건 적건 거의 모든 종류의 자료를 처리할 수 있었다. 폭격기로 운송하다 유실된 수소폭탄과 미국 및 소련의 잠수함을 찾았고,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평가하거나 리처드 파인만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비극을 예측하는 데에도 이용됐다. 베이즈 정리는 의학 분야에도 적용되어, 제롬 콘필드는 실험을 하지 않고도 기존 증거만으로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고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입증했다.

4부 '증명'은 베이즈 정리가 경영학과 의학, 법률, 공학, 공공정책 분야에 적용되는 사례를 다룬다. 로버트 오셔 슐라이파와 하워드 라이파는 베이즈 정리를 응용한 의사 결정 나무 이론을 개발해 기업의 의사 결정을 도왔다. 프레더릭 모스텔러와 데이비드 월리스는 역사적 수수께끼인 <연방주의자 논고> 문장을 베이즈 정리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각 논고의 실제 저자가 매디슨인지 해밀턴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존 튜키는 베이즈 정리를 이용해 닉슨과 케네디가 박빙의 승부를 벌인 1960년 미국 대선의 승자를 미리 예측하기도 했다. 노먼 칼 라스무센은 전문가 의견을 설비의 고장률과 결합하여 핵발전소 사고 위험 확률을 예측했다.

5부 '승리'는 20세기 후반 이후 컴퓨터의 발전과 베이즈 정리의 부침을 다룬다. 1980년대가 되면 환경학, 경제학, 보건학, 교육학 등 사회과학 연구자는 끊임없이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실생활의 데이터는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고 차원이 다양한 복잡한 데이터이므로 빈도론자나 베이즈론자나 분석에 애를 먹었다. 스튜어트 저먼은 컴퓨터를 이용해 몬테카를로 기법을 개량한 깁스 샘플러를 개발했다. 에이드리언 스미스는 적분을 마르코프 사슬로 대체한 몬테 카를로 기법을 개발하여 베이즈 정리가 나온 지 250년 만에 실제 사전 확률을 계산하고 복잡한 사후 확률까지 계산할 수 있게 됐다. 데이비드 스피겔홀터는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그래픽 사용자 환경에서 수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벅스(BUGS)를 탄생시켜, 베이즈 기법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제 '정확한'이라는 말은 '시뮬레이션을 거친'으로 통하고, 컴퓨터의 반복 연산이 방정식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베이즈 정리는 역사적으로 다섯 차례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맨 처음 이 정리를 발견한 베이즈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땅에 묻었다. 프라이스가 정리해 발표했지만 학계에서는 외면당했다. 라플라스는 독자적으로 베이즈 정리를 발견해 적용했지만 만년에 빈도론을 선호하게 됐다. 빈도론자는 베이즈 정리를 백안시했다. 마지막으로 군은 기밀이라는 명목으로 베이즈 정리 활용 사례를 철저하게 덮었다. 통계학의 역사에 등장한 걸출한 여러 인물도 자신이 베이즈론자가 아니라고 강변하거나 베이즈 정리에 대한 입장 표명을 미루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튜키가 1960년 대선 예측에 활용한 베이즈 방법론을 일찍 공개했다면, 2008년 미국 대선 결과를 정확하게 맞춘 네이트 실버의 등장이 앞당겨졌을 지도 모른다.

<불멸의 이론>은 베이즈 정리 등장 이후 250년 동안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를 600여 쪽에 빼곡하게 옮겨놓은 책이다. 네이만과 피셔의 대립이나 콘필드와 피셔의 대립 등 현대 통계학의 주요 쟁점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만, 단순한 역확률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사례만 짚어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데이터 과학자가 빅데이터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 최근, 빈도론자와 베이즈론자의 뿌리 깊은 갈등은 잠시 잠복한 듯하다. 데이터 과학자는 표본으로부터 얻은 정보로 모집단을 추정하는 통계학적 추론을 넘어 전체 데이터를 수집해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한다. 표본과 모집단, 원인과 결과, 귀무가설과 대립가설,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 등 통계학이 학문적 체계를 세운 바로 그 지점에서 근본적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불멸의 이론>은 통계학뿐만 아니라 통계학 지식이 활용된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온 이 책의 한국어판은 통계학 전문가의 감수조차 받지 않았다. 통계학 용어와 설명도 정확하지 않은 대목이 많고, 그 외 학문 분야 용어는 오류가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제롬 콘필드의 업적을 다룬 '8장 질병의 원인을 찾다'를 원문과 대조해보니,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의학 용어집조차 참고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또한 편집자의 검독을 거쳤다고 믿기 힘든 오탈자가 본문에 자주 등장해 책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불멸의 이론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불멸의 이론> 본문 마지막 문장이다. 한국어판을 만든 과정에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어떤 종류건 데이터를 다루는 분야 전공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불멸의 이론>은 이제 막 번역됐을 뿐이다.

더 읽으면 좋을 책

<통계학의 역사>(스티븐 스티글러 지음, 조재근 옮김, 한길사 펴냄, 2005)

스티븐 스티글러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통계학의 역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자다. 최근 스티글러 교수는 고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런던의 서점 판매 목록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베이즈 논문의 원래 제목을 찾아내 학술지에 보고하기도 했다. <통계학의 역사>는 20세기 이전까지의 통계학사를 700쪽에 걸친 방대한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다. 제1부 1827년 이전 천문학과 측지학에서의 수리통계학 발달사에 베이즈의 발견과 라플라스의 업적이 상세히 나와 있다. 저자의 방대한 각주만큼이나 역자의 꼼꼼한 역주를 읽다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데이비드 살즈버그 지음, 박중양 옮김, 자유아카데미 펴냄, 2012)
데이비드 살즈버그는 제약회사에서 닦은 실무 경험이 탄탄한 통계학자다. 여러 대학에서 통계학을 강의하면서 많은 통계학자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20세기 통계학의 주요 인물과 업적을 짧게 소개하고 있다. 13장 제목이 '베이즈 정리에 기반을 둔 이단적 통계학'이다. <불멸의 이론>에 언급된 통계학자 대부분이 등장한다. 20세기 통계학의 발전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가장 적합한 책이다. <통계학의 역사>와 달리 역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역주가 없고 오탈자가 많은 점은 흠이다.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니시우치 히로무 지음, 신현호 옮김, 비전코리아 펴냄, 2013)

니시우치 히로무는 도쿄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생물통계학을 전공한 신진 연구자다. 원서 제목은 "통계학이 최강의 학문이다"로, 과장의 혐의가 짙다. 통계학의 역사와 활용 분야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고 있다. 제6장 통계학의 여섯 가지 활용 분야 마지막 절 제목이 "베이즈파와 빈도론파의 확률을 둘러싼 대립"이다. 스팸메일 분류에 베이즈 정리를 활용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빈도론과 베이즈론의 차이를 요약·정리 형태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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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기거렌처 선생의 <Calculated Risks>를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전현우 씨와 함께 옮겼다. 책을 옮기면서 옮긴이의 주를 몇 군데 달았지만 대중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활자로 인쇄되지는 못했다.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옮긴이의 주를 블로그에 옮겨놓는다.


[관련글]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역자 후기

출판사 책 소개 페이지


한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3장 47쪽)


한국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2011년 기준 5229명으로, 인구를 약 5000만으로 보면 매년 약 9500명 가운데 한 명 꼴로 길 위에서 사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은 독일이나 미국에 비해 월등히 높고, 차량 총 주행거리 역시 짧은 편이기 때문에 승용차 주행거리당 사망자 수는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보인다. OECD 통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2008년 한국에서는 승용차 주행거리 2474만 킬로미터(약 400km 수준인 서울-부산을 약 85년 정도 매일 왕복 운전한 거리) 당 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반면 미국에서는 1억 1026만 킬로미터 당, 독일에서는 1억 9461만 킬로미터 당 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어떤 ‘예술가’ 의사는 환자가 자신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6장 121쪽)


저자는 artist를 최고 수준의 기예를 발휘하는 의료 전문가라는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구현하는 예술가라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예술가라는 표현으로 번역했다. 히포크라테스의 경구로 유명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는 문장도 “의사 한 사람이 의술을 완전히 익히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시간은 너무나 짧다.”로 풀이하는 편이 낫다.



충분한 설명에 따른 동의라는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호프라게와 나는 대장암·페닐케톤뇨증·강직성 척추염에 대한 표준적인 검사 결과를 의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연 빈도를 사용해 제시했다. (6장 144쪽)


페닐케톤뇨증은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 대사 장애가 있는 선천성 유전병으로 체내에 페닐알라닌과 대사 산물이 축적되어 지능 장애, 담갈색 모발, 피부의 색소 결핍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페닐케톤뇨증이 있는 신생아는 진단 후 페닐알라닌이 적은 특수 분유를 먹여 치료가 가능하지만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면 영구적인 지능 장애와 발달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여기서는 대장암에 대해 표준적인 검사 방법으로 사용되는 잠혈 검사에 대해서만 검토해볼 것이다. (6장 144쪽)


한국에서 50세가 넘은 모든 사람에게 매년 잠혈 검사를, 그리고 매 10년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수행한다고 해보자. 50-74세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1212만 명이다. 이들에게 매년 잠혈 검사를 수행하려면 연간 약 1217억 원이 소요된다. 또 이들을 10개의 균등한 숫자로 이뤄진 집단으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10년마다 한 번 수행하는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게 하면 연간 약 1592억원이 필요하다. 결국 두 검사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매년 약 2809억 원 수준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국가암조기검진사업에서는 대장암 검진을 위해 잠혈 검사를 1차로 시행하는 한편, 결과가 양성일 때 대장내시경 또는 대장이중조영 검사를 시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 계산에는 국립암센터 국가암관리사업본부 전재관 박사가 도움을 주었다.



법정에서의 절차에 대한 지침서와 법학 교과 과정에 심리학과 통계학을 포함시키는 조치가 필요하다. (9장 218쪽)


참고로, 우리 법원의 실무에서 확률에 대한 고려는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 책이 우려하는 사태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통계나 회귀분석이 공정거래법 사건 등에서는 약간 쓰이고 있으나, 통계 관련 전문가 증언이나 감정은 그 자체로 믿어서는 안 되고 다시 법원이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특히 형사사건에서 확률이나 통계가 증거로 제출되는 일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법률가 일반이 이런 통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상황은 서구와 동일하므로, 전문가 증언에 대한 법원의 평가가 잘못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형석 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통계적 생각은 언젠가 반드시 읽고 쓰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유효한 시민권에 필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웰스가 한 말이다. (12장 271쪽)


H. G. 웰스의 1903년 작 『만들어지고 있는 인류Mankind in the making』에 수학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표현이 들어간 문장이 실려 있지만 통계학에 관한 언급은 없다. 저명한 통계학자이며 미국 통계학회장을 지낸 사무엘 윌크스가 1950년 110차 미국 통계학회 연례 회의 연설에서 웰스를 빌어 미래의 시민은 통계적 사고가 읽고 쓰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을 남겨 유명하게 되었다. 웰스의 표현이 바뀌어 온 과정은 텍사스 대학의 제임스 탱커드 주니어가 쓴 「통계학에 대한 H. G. 웰스의 언급: 정확한 질문」이라는 소논문에 상세히 나와 있다. (출처: Historia Mathematica 1979:6;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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