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소설 읽기로 서늘한 여름 나기


황승식(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사회의학교실)


오늘도 폭염주의보가 발효됐다. 마른 장마의 영향이겠지만, 지난 6월이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더웠다는 제목의 뉴스가 포털 사이트 대문을 차지하고 있다. 장마가 안 끝났으니 휴가를 떠나긴 이르다. 감염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한 기분을 느끼면 더위도 물리치고 냉방비 전기값을 아낄 수도 있다.


편혜영 작가의 2010년 작 『재와 빨강』은 방역 전문가가 쥐를 매개로 한 감염병이 유행하는 C국에 파견되고 난 후 겪게 되는 아수라장을 소설로 그려냈다. 주인공은 전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숙소인 아파트먼트 4층에서 뛰어내려 지상의 공원과 쓰레기 소각장으로, 맨홀 아래 하수도로 하강해간다. 부랑자로 추락했다 쥐를 잡는 기술이 밝혀져 방역원으로 차출당한 주인공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며 C국에서 지내게 된다. 소설의 대단원에서 마침내 감염병은 사라지고 일상을 되찾지만 주인공은 잠복한 바이러스처럼 모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C국에서 방역원 역할에 충실하며 지내게 된다.


『재와 빨강』에서 감염병이 유행하는 C국은 소설의 배경에 불과하다. 제3국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공중보건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보건당국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소설에 묘사된 문장만으로는 바이러스 매개체가 쥐인지도 불분명하다. 공항 검역관의 설명을 보면 소설이 발표될 무렵 유행했던 신종 플루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듯하다. 쥐를 매개체로 한 감염병이 소재고, 주인공이 쥐를 잡는 방역원인 소설이 많이 팔릴 까닭이 없다. 소설이 발매되고 작가가 필화를 겪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적어도 ‘그분(과 충성심 강한 부하들)’은 안 읽으셨을 듯하다.


한상운 작가의 2012년 작 『인플루엔자』는 좀비를 모티프로 한 세기말 판타지다. 소설의 배경은 강남 한복판의 특급호텔, 정확히는 8차선 대로가 내려다보이고 사방이 고층빌딩들로 에워싸인 호텔의 옥상이다. 그곳에 수도권 영공방어를 위한 대공포진지가 설치되어 있고, 21세 청년 제훈은 여기서 다른 11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군복무중이다. 제훈은 여자친구가 보낸 이별 편지에 탈영을 고민 중이다. 하지만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차이나플루 때문에 몇 달째 휴가 외박은 전면 중지된 상태. 곧이어 차이나플루 백신의 부작용으로 '좀비증후군'이 발병하고, 도시는 삽시간에 핏빛 지옥으로 변한다. 제훈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지만 좀비는 숫자가 늘어나 점점 파국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인플루엔자』 역시 감염병은 배경 소재일 뿐이다. 차이나플루 백신의 부작용이 어떻게 좀비증후군을 발병시키는지 설명은 가물가물하다. 뉴스 형식을 빈 설명에 따르면 뉴욕에서 최초로 발생한 좀비는 백신 접종 후 토혈 후 ‘발광’을 일으켰다고 하며 보건 당국은 변종의 내성 바이러스 출현을 의심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좀비증후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질병연구소 소장’의 입을 빌어 설명되지만, 내용은 국제적인 명성과는 거리가 먼 평이한 수준이다. 합병증, 후유증, 감염병, 전염병이 혼용되고 있다. 『인플루엔자』는 서울 강남을 무대로 한 차이나플루 백신의 부작용으로 좀비가 활개치는 1인칭 슈팅 게임(First-Person Shooter, FPS) 시나리오에 어울린다.


정유정 작가의 2013년 작 『28』은 수도권 북쪽 가상 도시 화양에서 대유행한 인수공통감염병 사건을 소재로 한다. ‘빨간 눈 괴질’로 불리는 원인불명 감염병은 인간과 개 사이에 전염되며 치명률이 100%에 가깝다는 점에서 광견병이나 이볼라와 비교된다. 작가는 28일 동안 감염병이 휩쓸고 간 도시를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유기견을 돌보는 수의사,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재난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 감염병 환자를 돌보는 응급실 간호사, 그리고 개(!)의 시선이 교차하며 작가는 모든 주인공을 형언하기 힘든 극한 상황까지 내몰며 독자를 긴장케 한다.


『28』에 묘사된 화양은 여러 모로 1980년 광주를 연상케 한다. 감염병이 확산되자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속하게 화양을 봉쇄하기 위해 특전사 병력을 동원해 포위한다. 빠져나가려는 시민은 사살된다. 봉쇄 직후 풀렸던 언론과 인터넷은 곧바로 끊긴다. 감염병 희생자는 병원 수용이 어려워 체육관으로 옮겨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영안실이 된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았다지만 개를 통한 인수공통감염병의 감염 경로는 소설 속에 분명하지 않다. 사실 인수공통감염병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중요하진 않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초고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해 상당 분량 집필했다가 덜어냈다고 한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심각한 공중보건응급상황에서 주무 당국인 질병관리본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작가가 중환자실 간호사로 5년을 지낸 내공으로 질병과 환자에 대한 묘사는 어떤 작품보다 생생하다.


책을 세 권이나 사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28』을 추천한다. (세 권 중 책값은 가장 비싸다.) 책 띠지는 손이나 베는 흉물이지만 『28』의 띠지는 버리면 안된다. 스마트폰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기 전에 책 띠지의 QR 코드를 반드시 찍어보기 바란다. 북사운드트랙을 제작한걸 보면 이미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 판권 계약도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하필 『28』을 읽기 직전에 후쿠시마 현 미나미소마 시립 병원에 동일본 대지진 후 떠돌이가 된 개에 물린 환자가 증가했다는 논문을 읽었더니 소설 속 상황에 기시감까지 드는 무덥고 서늘한 오후다.


(새얼뉴스레터 2013년 75호)


Posted by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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