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얼뉴스레터]76호: 허현회 현상
중얼 연습 2013. 11. 11. 19:11 |새얼뉴스레터 76호에는 '허현회 현상'이라는 제목의 쪽글을 썼다. 새로 덧붙인 말은 거의 없고 기존에 했던 말에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몸에 좋은 카레' 해프닝과 벵베니스트, 웨이크필드, 트루도 등의 사례만 몇줄 붙였다.
허현회 현상
허현회라는 저자가 있다.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펴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활발한 트위터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여러 언론이 다루기도 했다. 책 내용은 의아함을 넘어 황당하다. 천연 알코올은 인체에 유익한 약이고, 천연 니코틴 역시 인체 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천연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H2O는 물이 아니고, 염화칼슘에는 나트륨이 98% 들어있으며, HIV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주장까지 읽다보면 필자가 온전한 정신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저자가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책 ‘들어가며’에 나와 있는 내용과 인터뷰 기사를 통해 짐작 가능하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큰 수술을 받았고, 40대 초에는 당뇨 진단을 받았으며, 비염으로 고생하다 어느 순간 모든 약을 끊고 식이요법으로 많은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 현대 의학을 수치에 맹종하는 신흥 종교로 몰아붙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셈이다. 책의 상당 분량이 의사를 무지와 탐욕에 젖어 시민을 상대로 마약 장사를 하며 부를 축적해가는 현대 의학이라는 종교의 전도사로 비난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저자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의학 서적을 뒤적이고 자료를 정리하면 할수록 현대 의학이라는 무지한 학문과 주류 의사라는 탐욕에 젖은 부류들의 허구를 깊이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장의 근거가 적절한 지 찾고 비판하는 일이 본업인지라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책 맨 뒤에 수록된 참고문헌을 본문의 주요 주장과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상상했던 수준 이상이었다. 참고문헌의 절대 다수는 현대 의학을 비난하는 외국 저자의 번역서에 대한 2차 인용이었다.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린 맥타가트, 2011년)였다. 통째로 가져온 대목도 보인다.
참고문헌 중 의사들의 주장도 찾아봤다. “초음파검사는 태아에게 유해한가?”(박중신, 대한의사협회지, 2008년)는 저자의 입맛에 맞게 문장을 짜깁기하여 마치 유해한 것처럼 써놨다. 참고문헌에 오타도 많고 인용 방법도 틀린 곳이 여러 군데며 찾아보기도 없다. 저자가 과학적 글쓰기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음은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타임지에 관절염을 카레로 치료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책에 싣고 트위터에도 올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평소 저자에 비판적이던 의사가 타임지 본문을 대조해 카레라는 단어는 있지도 않고 적절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으며 카레는 케어(care)의 오역임을 밝혔다. 참고문헌 목록을 통해 저자가 의학 자료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증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유사과학으로 무장한 자칭 의료전문가의 등장은 한국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물에 기억력이 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동종요법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 지에 실었다가 철회당한 벵베니스트 사례가 있다. 동종요법은 동식물이나 광물 등 천연물질을 사용하고 희석하므로 해가 없다고 주장하여 대체의학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동종요법의 과학적 효과는 이해 당사자의 발언과 개인의 경험 이상의 증거가 없어서 저자가 책에서 주장한 대목과 유사하다. 전직 외과의사인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MMR 백신과 자폐증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란셋’에 실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저널리스트 한 명이 백신 제조업체와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인 변호사에 의해 웨이크필드가 고용됐고 조작된 결과가 논문으로 발표됐다는 사실을 파헤쳤다. 이미 밝혀진 잘못된 주장 또한 저자의 책에 비판 없이 실려 있다. 케빈 트루도는 『자연 치료법: ‘그들’은 당신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책에서 각종 음모론을 주장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과 연방무역위원회의 제소를 받아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저자의 주장을 비과학적이라고 비웃기는 쉽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수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하기도 곤란하다. 의사 사회도 노이즈마케팅이 분명하므로 무시해야 된다는 의견과 일일이 반박하고 필요하면 법적 조치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나 대한의학회 차원에서 저자의 책을 포함해 문제 있는 주장이 실린 여러 책을 대조하여 꼼꼼하게 반박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소설 속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냈듯이 저자는 현대 의학이라는 신흥 종교에 감염된 의사라는 괴물을 베껴왔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한강의 괴물 생명체는 미군 기지에서 무단 투기한 포름알데히드가 만들어냈다. 저자 책 속에 등장하는 괴물 의사는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할 시간조차 없이 진료에 내몰리는 한국 의료 현실과 선정성에 굶주린 황색 저널리즘이 만들어냈다. 바람직한 환자-의사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대중들에게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언론에 노출되는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의사로는 제2, 제3의 허현회 현상을 막을 수 없다.
(새얼뉴스레터 2013년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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