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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29 [영화평] 잭 키보키언을 아시나요?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소식지 <근거와 가치> 2012년 가을호(통권 20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 이야기] 코너에 영화 '유돈노우잭'에 대한 감상평을 써서 보냈다. 쓰기 시작할 때는 커트 보니것 선생이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시도한 대화 형식으로 재밌게 구성해보려 했으나 능력 부족을 절감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Jack Kevorkian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제27차 외래어 심의회 1999년 4월 22일)에 따르면 잭 키보키언이다. 표기법에 맞춰 써보냈더니 편집자가 모두 케보키언으로 바꿔놓았다.


잭 키보키언을 아시나요?

- 영화 '유돈노우잭'에 대한 단상


가을 태풍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밀린 일과 원고 마감에 힘겨워하다 잠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맞춰 의식은 푸른 터널을 통과했다. 긴 터널 끝에 백발의 노인 잭 키보키언이 서 있었다.


황승식(이하 황): 키보키언 박사님 아니신가요? 텍사스 주 헌츠빌의 독극물 주사 사형실에서 풀려나신 건가요?

잭 키보키언(이하 키): 내가 미국에서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구려. 커트 보니것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 다시는 임사체험을 위해 사형실로 불려 가지는 않는다오.

황: 한국에서도 선생님은 ‘죽음의 의사’로 알려져 있죠. 그나저나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 의사 조력을 얻진 않으셨던데, 무슨 이유가 있으셨나요?

키: 나야 간암에 신장도 나빠져서 고통 없는 상태로 죽음을 맞았으니 굳이 다른 의사나 약물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없었지. 그걸 캐묻기 위해 여기까지 왔소?

황: (당황하며) 아뇨, 오늘은 선생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유돈노우잭> 얘기를 듣기 위해 찾아왔어요. 알 파치노 연기는 마음에 드셨나요?

키: 대단했지! 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캐릭터 분석을 많이 했어. 알이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탈 때는 내가 직접 시상식까지 가서 축하해줬지.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많이 봤소?

황: 저도 에미상 시상식 장면을 봤는데 배우보다 선생님께서 더 기쁜 표정이시던데요? 아쉽게도 케이블 영화라 한국에서 극장 개봉은 못 하고 바로 DVD로 출시됐어요.

키: (기침하며) 아, 그랬군. 나도 2007년에 출소한 뒤로 알을 처음 만났다네. 참 멋진 배우야.

황: 췌장암 진단을 받고 선생님 조력으로 세상을 마친 시민운동가 역할을 한 수전 서랜든은 어땠나요?

키: 알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여배우와는 처음으로 연기해서 기뻤다더군. 나는 수전과 자주 만나진 못했는데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큰 키라 올려다보기 힘들었다네.

황: 저는 선생님이 재판정의 판사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키: 베리(베리 레빈슨 감독을 말함)가 갑자기 한 번 해보겠느냐고 물어서 흔쾌히 수락했지. 내가 재판을 여러 번 받아봐서 판사 연기하긴 어렵지 않았다네(웃음).

황: 푸른 터널 끝에서 혹시 선생님 도움으로 이곳에 온 사람을 만나진 않으셨나요?

키: 여기가 생각보다 넓은 곳이라 아직 한 명도 못 만나기는 했지만 만나면 틀림없이 나한테 고마워할 거라네.

황: 제가 아직 여기 오기엔 일러서 곧 되돌아가야겠네요.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웠고요, 혹시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키: 나를 욕하기 전에 일단 영화를 꼭 한 번 보라고 하고 싶네. 한국도 고통스럽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를 본인이 충분히 판단 가능한 때가 되지 않았소?


의사 조력 자살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많은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되 죄인을 미워하기 십상이다. 자비로운 살인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도 죽음의 의사인 잭 키보키언과는 선을 긋는다. 〈유돈노우잭: 잭 키보키언의 삶과 죽음〉은 2010년 미국 케이블 채널 HBO에서 상영된 영화로 미시간 주 병리학자인 잭 키보키언의 일대기를 다뤘다. 키보키언 역은 배우 알 파치노가 맡아 열연을 펼쳐 62회 에미상과 68회 골든글로브상 남우주연상 부문을 휩쓸었다. 전기 영화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잭 키보키언의 전기는 순교자로 가장한 자기애적 열정을 풀어놨지만, 알 파치노는 가장 비열한 악당에게도 애정을 품게 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역할에 침잠하면서도 결코 키보키언의 괴짜 같은 매력이 캐릭터의 병적인 자기애를 덮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안경을 쓰고 평범한 외모로 등장하는 수전 서랜든은 키보키언과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지역의 헴록 협회 대표인 자넷 굳 역을 맡아 기민한 연기를 펼쳤다.

안락사에 대한 영화는 아무리 대본을 신중하게 집필했다고 해도 찬성과 반대, 어느 한 쪽의 공격과 비난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양쪽이 불평할 만한 꺼리를 찾아내는 데서 타협하게 된다. 영화는 죽음의 의사라는 별명이 붙은 남자의 죽을 권리를 향한 열정과 편협한 자기애라는 양면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베리 레빈슨 감독은 1998년 키보키언이 토마스 유크에게 치명적인 약물을 주입하는 장면을 보여줬던 “60분” 장면 일부를 포함하여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를 구성했다. 이 사건으로 키보키언은 1999년에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7년에야 가석방됐다. 키보키언은 언론에 자신을 설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미국에서 말기환자 치료를 나치 실험에 비교하거나 미국을 전체주의로 묘사하는 등 극단적인 수사로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의료윤리나 다른 전문가의 의견 또는 법적 구속에 대해 부주의했고, 환자의 말과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했다. 영화는 키보키언의 죽을 권리 실행에 대한 열의와 독선, 그리고 오싹한 비열함을 잘 포착했다. 그는 자신의 피를 이용해 오싹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직접 만든 낡은 죽음으로 이끄는 기구를 제작하며, 낡은 승합차를 이용해 환자를 죽음으로 이끌기도 했다.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설득력을 훼손하진 못하고, 유창하지 못한 연설이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도 있다. 영화 〈유돈노우잭〉은 죽음을 옹호하는 한 노인을 사려 깊고 통찰력 있게 묘사한 수작이다. 케이블 채널 HBO에서 제작한 관계로 국내에서는 극장 상영을 못하고 바로 DVD로 판매된 점은 몇 년이 지나도 애석하지만, 몇 개의 영화가 스크린을 과점한 시대에 과연 상업적 상영이 가능했을지 의문이긴 하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지난 2009년 김 할머니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 이후로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이라는 용어 통일과 관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했고,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률적 보완과 사회적 합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011년 현재 한국은 하루 평균 44명이 자살하고 20대 사망자 중 절반은 자살이며, 급속한 노령화에 노인 자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살 공화국이다. 키보키언은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망 없이 연명하고 있는 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과격하게 주창했다. 한국 사회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고, 누릴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데도 실패했다. 이래서는 키보키언이 설파한 존엄하게 죽을 권리 논의를 감히 꺼낼 수가 없다.





Posted by 사이버독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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