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강형평성학회 소식> 제2호(2008.2)에 『지도와 권력』을 읽고 쓴 서평이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조립한 글이라 애초에 생각했던 논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마무리한 듯한 아쉬움이 든다. 『지도와 권력』은 2012년 9월에 『세계지도에서 권력을 읽다』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와 있다.


아서 제이 클링호퍼 저/이용주 역 | 알마 | 원제 The Power of Projections | 2007년 10월


사회과부도건 지리부도건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도책에서는 백제군과 신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십자군의 수차례 침공을 막아내는 이슬람군의 놀라운 전술이 있었으며, 대나무와 쌀보리가 차령산맥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시한 위인전 빼고는 달리 읽을거리가 없던 소년에게 지도책은 나와 세상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패스워드였다.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다니던 부동산에도 벽에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책에 나오는 논밭과 임야 기호, 그리고 등고선은 희미하기만 하였다. 각종 재개발 예정지, 지하철 역사 선정지 등 한 푼이라도 더 높은 값으로 매겨지기 위해 안달인 표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출금으로 전세 아파트를 구하려는 청년에게 지도는 모든 물질이 돈으로 환산되어야한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확인시켜주는 삽화였다.


『지도와 권력』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투영된 권력: 지도는 어떻게 국제 정치와 역사를 반영하는가(The Power of Projection: How Maps Reflect Global Politics and History)이다. (필자가 편집자였다면 '와'라는 건조한 조사로 연결된 제목보다 원제에 가깝게 『투영된 권력』 또는 『지도는 권력이다』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저자 아서 제이 클링호퍼 교수는 미국 럿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다수의 저서를 통해 인권, 학살, 소비에트, 아파르트헤이트, 원유와 금의 정치학 등의 주제를 다룬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지도 제작자의 관점이 어떻게 지도에 투영되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현대까지의 다양한 지도 제작 원리를 탐구하여 지도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저자의 주요 논지는 실제로 3차원인 지구를 2차원의 지도로 만드는 과정에는 반드시 왜곡이 개입될 것이고, 이러한 왜곡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지도 제작자의 의도와 제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가 투영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 지도하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도가 바로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에 의해 그려진 세계지도다. 이 투영도법에 따르면 위도가 적도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면적이 넓게 그려져서 북아메리카와 유럽이 아프리카나 인도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실제로는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 면적의 3분의 2 정도이며, 유럽 전체가 인도와 비슷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지도 제작자 메르카토르가 살고 있던 16세기 유럽의 시대적 한계와 지도 판매라는 상업적 고려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지도를 통해 전세계 학생들에게 서양 중심의 지리관과 세계관을 심어주는 구실을 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메르카토르 투영도법(Mercator projection) 세계지도(출처: 위키피디아)


반면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하여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린 경우도 있었다. 독일 출신 아르노 페터스는 지도가 사회정의 구현과 투쟁에서 중요하다고 믿었고, 등면적 도법을 이용하여 '백인 우월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근거한 과거의 세계지도와 달리,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도를 그리고자 했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크기가 줄어들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커져서 세로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지도는 지리학계에서는 배척당했지만 상업적 의도에서 기획되어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세계관 수립에 일조한 메르카토르 지도에 대한 도전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지녀서 저자는 이 둘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골-페터스 투영도법(Gall-Peters projection) 세계지도(출처: 위키피디아)


이 책은 "지도는 세계의 역사와 정치를 묘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반영에 불과하"므로, 지도 제작의 "과정을 숙고하고 그것을 만든 제작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는 저자의 의도가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므로, 밑줄 그어가며 심각히 읽지 않아도 지도 제작에 얽힌 정치와 역사의 이면을 파악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관련 분야의 전공자에게도 70여 쪽에 달하는 후주가 달려 있어서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2006년에 초판이 나온 책답지 않게 전지구위치확인시스템(GPS)이나 지리정보시스템(GIS)의 활용과 보급에 담긴 정치사회적 의미와 개인이 맞춤형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된 컴퓨터 환경의 발전과 잠재력에 대해서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지 못하고 저널리즘적 해석을 경계해야 된다고 언급하고 넘어간 점은 아쉽다.


현재 건강형평성 연구 분야에서는 좀더 다양하고 과감한 형태의 테마 지도의 제작과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 수준뿐만 아니라 집단 수준, 특히 지역 수준의 건강형평성 제고를 위해서 지역 단위의 기본적인 시각화는 필수적이다. 최근 월드맵퍼(Worldmapper: The Human Anatomy of a Small Planet) 연구는 전 세계의 공중보건비용을 지도화하고,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역별 영아 사망률, HIV/AIDS 유병률, 말라리아 발생건수 등을 왜곡시켜 지도화한 것으로 흥미로운 연구 사례이고, 지역 수준의 건강형평성 제고를 위해 공간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리정보시스템을 활용한 연구의 질과 양이 날로 증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를 위해서는 Social Science and Medicine 통권 65권 9호, 2007년 11월호 특집호를 보라.)


영아사망률 세계 분포(출처: 월드맵퍼)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내게 세계를 알려주셨고, 내가 플라스틱 삽으로 땅을 파내려 간다면 결국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던" 부모님께 책을 바친다고 하였다. 한국의 건강형평성 연구에서도 '생태학적 오류(ecologic fallacy)'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공간 정보를 활용한 연구가 날로 늘어나기를 기대하며 관심 있는 회원들의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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