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심수봉, 나는 야구광, 1987년. [링크]


1. 그랬거나 말거나 1982년의 베이스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 결승전에서 좌측 폴을 맞춘 한대화 선수의 결승 홈런을 따라한다며 셀 수 없이 많은 공을 동네 전봇대를 향해 날렸고, 비례하여 옆집 유리창은 깨져나갔다. 고교야구 광팬이었던 큰누님의 강권으로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다. 화니백화점 5층 모집 코너에 찾아가 연회비 5천 원을 내고 모자, 점퍼, 팬북, 사인볼과 라디오까지 받아왔다. 빨간색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 점퍼와 야구 모자는 교복과 같았다. 디자인이 예뻤던 베어스 점퍼와 모자를 쓰고 왔던 철준은 애꿎은 시비 끝에 다음 날 다른 옷을 입고 와야 했다.[각주:1]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광주학살이라는 원죄를 저지른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탓에 비판의 목소리도 컸지만 지역 연고 고등학교 야구의 폭발적 인기를 고스란히 흡수해 연착륙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4명의 선수로 시작했다. 김성한은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며 10승과 13홈런을 기록했다. 김봉연은 발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도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기록했다. 소수정예로 고군분투 끝에 원년 시즌 4위를 차지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승률 .188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원년 우승을 차지한 OB 베어스 상대 16전 전패라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각주:2]


1983년 전기리그는 너구리 장명부 투수를 영입한 삼미 슈퍼스타즈와 코끼리 김응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해태 타이거즈가 불꽃 튀는 선두 경쟁을 벌였다. 그해 6월 7일 두 팀의 전기리그 마지막 3연전이 무등경기장에서 열렸다. 2.5 경기차로 선두 삼미를 뒤쫓던 해태는 초조했다. 이상윤, 김성한, 주동식을 내세워 3연전을 쓸어담은 해태는 반경기차 선두로 올랐다. 내친김에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그해 가을 후기리그 우승팀 MBC 청룡을 4승 1무로 제압하여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훗날 광주팬은 그해 3연전을 ‘광주대첩’이라고 이름붙여 기억하고 있다.[각주:3]


2. 그랬거나 말거나 1988년의 베이스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식이 열린 9월 17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다. 토요일 오전 친구들과 탁구 한 판을 치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후 티비 앞에 앉았다.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고, 성화대에서 비둘기를 태우고, 코리아나가 부르는 ‘손에 손잡고’를 친구들과 함께 손에 손잡고 목청껏 불렀다. 망치를 들고 노래를 가르쳤던 음악 선생님의 반복 학습 효과는 확실했다.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팀도 해태 타이거즈였다. 출범한 지 채 십 년이 안 된 시점에 최초로 3년 연속 우승과 4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타이거즈 투타의 기둥인 선동열과 김성한의 활약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선동열은 최우수 평균자책점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김성한은 홈런, 타점, 최다 안타, 최고 장타율 타이틀 4관왕과 함께 시즌 MVP를 수상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신흥 강자로 등장한 빙그레 이글스를 맞아 4승 2패로 꺾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은 태평양 돌핀스로 바뀌었다. 개막 직전인 1988년 3월 9일에서야 만년 꼴찌팀인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탓에 전력은 바닥이었다. 시즌 초반 1승 13패라는 부진 끝에 창단 감독을 맡은 강태정 감독이 경질되고 임신근 감독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뤘다. 시즌 종료 후 OB 베어스 감독에서 물러난 김성근 감독을 영입해 다음 해인 1989년 시즌 3위라는 호성적을 거둬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3. 그랬거나 말거나 1998년의 베이스볼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DJP 연합에, 이인제 탈당에, IMF 경제위기라는 상황에서도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 차로 간신히 누르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사 상 최초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이듬 해 1998년 한국 프로야구는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은 재벌그룹이 대부분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 선수단 운영비가 줄어 선수들 사기가 많이 꺾였다. 잠실 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경기를 리드하던 후반 3루측 원정 관중석에서 어김없이 울려퍼지던 ‘목포의 눈물’이 사라진 해도 이 무렵이다.[각주:4]


모그룹인 해태가 경제위기로 휘청거리자 해태 타이거즈의 위기는 가중됐다. 1996년과 1997년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인 이종범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거액의 이적료를 받고 보내자 정규시즌 5위로 마감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유행어도 이 당시 만들어졌다. 시즌을 마치자마자 최연소 구원왕을 차지한 임창용까지 우승에 목마른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하면서 타이거즈의 흑역사가 시작됐다.


1998년 인천 연고 야구팀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였다. 재정난에 허덕인 쌍방울 레이더스 투타의 핵심인 조규제와 박경완을 영입하고, 정민태라는 에이스를 필두로 선발진 5인 전원이 10승 이상을 거뒀으며, 스캇 쿨바라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클린업에 넣은 결과는 당연하게도 정규시즌 1위 성적이었다. 한국 시리즈에서는 4승 2패로 LG 트윈스를 꺾고 창단 첫 우승과 함께 인천 연고 야구팀 최초로 프로야구 우승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4. 그랬거나 말거나 2009년의 베이스볼


2009년 4월부터 5월까지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베쓰볼 인천 인천야구 백년사’ 전시회가 열렸다. 인천 야구 100년사를 정리하고, 인천 야구의 우수성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였다. KBO, SK 와이번스, 인천고, 동산고 등 12곳의 개인, 기관, 학교로부터 300여 점의 자료를 대여해 전시했다.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가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2007년과 2008년에 이어 한국시리즈 3년 연속 우승을 기원하며 2009년 시즌의 개막을 며칠 앞두고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가 시작하자마자 궁금해서 한 번, 아내와 돌을 갓 넘은 첫째를 데리고 한 번, 지도학생들과 한 번, 세 번이나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회 물품 중 일부는 문학구장 인근 신기시장 야구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전시 중이다.


2001년 광주에 자동차 공장이 있던 현대-기아차 그룹이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다. 김성한 감독의 지도 아래 2002년과 2003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2004년과 2006년 두 차례나 최하위를 차지하는 흑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범현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년 차인 2009년 시즌 초 김상현을 트레이드하여 메이저리거 출신 최희섭과 함께 CK포를 구축했다. 로페스와 구톰슨이라는 준수한 외인 선발 듀오에 윤석민과 양현종이 가세해 선발진도 탄탄했다. SK 와이번스의 막판 추격을 따돌리고 12년 만에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조범현 감독은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우주의 기가 타이거즈를 감싸고 있다”는 야구계에서 드문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SK 와이번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두 자릿수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시리즈 최종전 끝내기 홈런은 프로야구 역사가 한국보다 훨씬 긴 미국에서도 한 번밖에 없고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진기록이다.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 1기라는 자랑이 희미해지고 그깟 공놀이에 일희일비하냐며 자책하던 30대 중반의 청년은 잠실야구장 외야 상단에 떨어지는 백구의 궤적을 화면으로 주시하며 굵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각주:5]


5. 그랬거나 말거나 2017년의 베이스볼


트레바리 읽을지도에서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는다길래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한국 프로야구에 남긴 기록은 사실 부끄러운 항목이 많다. 부끄러운 기록도 역사고 자랑스런 기록도 역사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부끄러운 기록을 세우고, 현대 유니콘스가 자랑스런 기록을 세운 숭의야구장(구 도원야구장)은 해체돼 2012년 인천 유나이티드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변모했다. 인천행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도원역 정류장에 정차하면 지하철 안에서도 경기장의 웅장한 날개를 볼 수 있다. 축구 전용 경기장 어디에서도 프로야구 초창기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아쉽다. 백년 한국 야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집약된 동대문야구장도 2007년 철거되어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바뀌고 말았으니 숭의야구장의 운명은 이미 그때 예정된 셈이다.[각주:6]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소설 속 산물이지만,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 팬카페는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2017년 프로야구는 초반 KIA 타이거즈의 선두 질주와 SK 와이번스의 홈런 기록으로 팬심을 사로잡고 있다.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는 시즌 초반 4 대 4 트레이드로 전력을 보강했다. 두 팀이 다시 한 번 포스트시즌에서 맞붙을지 여부는 시즌 초반이라 예측하기 어렵지만, 강력한 선발진을 갖춘 타이거즈와 막강한 홈런포로 무장한 와이번스의 대결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두 팀은 오는 7월 4-6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3연전을 가질 예정이다. 오는 3연전에는 가족과 함께 문학구장 외야 원두막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신기시장에 들러 인천야구박물관 전시물을 구경해봐야겠다. 

  1. "[삶과 문화] 삶은 야구다: 베이스볼 키드의 생애. 한국일보 2012년 4월 14일 자" 링크: https://goo.gl/soJUPK 에 실린 문장을 재활용했다. [본문으로]
  2. 마산고에서 야구를 하다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점에 취업해 공개 트라이아웃을 거쳐 삼미 슈퍼스타즈에 합류한 감사용 투수를 소재로 한 2004년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 당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영화에서 감사용 배역은 이범수가, 박철순 배역은 슈퍼스타 반열에 오른 공유가 맡았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감사용 씨는 식당 주인과 초등학교 야구감독 등을 거쳐 창원에 있는 할인마트 관리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https://goo.gl/zpxtnw [본문으로]
  3. "[야구의 추억, 일흔 네 번째] 꼴찌 ‘삼미 슈퍼스타스’의 서글픈 스타" 링크: https://goo.gl/yVWQm5 에 당시 3연전 결과가 상세히 나와 있다. 김은식 야구작가는 인천 출신으로 인천 야구의 오래된 팬이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야구의 추억> 시리즈는 2009년 동명의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본문으로]
  4. 김은식 야구작가의 역작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에 역사의 한 장면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5.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을 분석해 당시 SK 와이번스 김정준 전력분석팀장과 경향신문 이용균 야구기자가 <야구멘터리 위대한 승부>라는 단행본으로 펴낸 바 있다. [본문으로]
  6. 박준수 사진작가가 2007년 철거를 앞두고 열린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 들러 동대문운동장의 마지막 모습을 찍은 사진에 김은식 야구작가가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글로 정리한 사진집 <동대문운동장: 아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가 2012년에 나왔다. [본문으로]
Posted by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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