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필진 한 명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준비없이 경향신문 미래오디세이 필진에 합류하게 됐다. 두 달에 한 번 미래에 대한 잡설을 풀어놓는 일은 고역이다. 2017년 10월 26일 자 '미래오디세이: 2054년, 통계맹 퇴치 원년'은 기거렌처 선생의 책자 내용을 가져와 통계맹 퇴치라는 희망섞인 미래에 약간의 불안을 뿌렸다. 초고 분량이 짧다는 연락을 받고 두어 문단을 급히 추가하느라 도입부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미래오디세이: 2054년, 통계맹 퇴치 원년

황승식(서울대 교수·보건대학원)


때는 2054년, 소르본대학 대강당에서 수세기 동안 인류를 역병처럼 괴롭혀온 지적장애인 통계맹 퇴치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확률론 등장 400주년, 조지 불의 ‘사고 법칙’ 발간 200주년, 레너드 새비지의 ‘통계학 기초’ 발간 100주년을 동시에 기념하는 연도였다. 이 행사는 유럽연합 의장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공동 주최했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통계맹”이라는 주제로 패널 토론을 진행했으며, 사회는 소르본대학 경제학자 에밀 에쿠 교수가 맡았다. 패널로 섭외된 베를린에서 온 정치경제학자, 베이징에서 온 통계학자, 스탠퍼드에서 온 심리학자, 파리에서 온 과학사학자가 두 시간에 걸쳐 통계맹의 등장과 퇴치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정치경제학자가 먼저 2007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통계적 사고는 점점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필수불가결한 덕목이 되고 있으므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함을 지적한 최초의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통계학자는 메르켈 총리가 아니라 마오 주석이 일찍이 1940년대에 혁명 동지들에게 숫자 두뇌를 갖춰야 하고 기초 통계를 알아야 함을 강조했지만 문화혁명으로 인해 지체됐다고 반박했다. 심리학자가 즉각 ‘타임머신’을 쓴 현대 SF 소설의 아버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이미 20세기 초에 통계적 사고는 시민권의 필수 요소임을 강조했다며 되받아쳤다.


확률론이 등장한 1654년, ‘사고 법칙’이 발간된 1854년, ‘통계학 기초’가 발간된 1954년, 그리고 통계맹이 퇴치된 2054년까지 1754년을 제외하고 예외 없이 통계학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회자의 지적에, 과학사학자는 1761년에 사망한 토머스 베이즈가 아마도 1754년에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된 유명한 정리를 발견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부연 설명했다. 심리학자가 통계맹이 이름을 얻게 된 해는 1988년으로, 존 앨런 파울로스 뉴욕대 교수가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발간하면서 대중에게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자, 과학사학자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인디애나대 교수가 1982년 발표한 문헌을 파울로스 교수가 인용하는 일을 깜빡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미국에서 DNA 검사법이 도입된 지 서른 해가 지난 2016년에야 국제사법연합이 법정에서 확률 대신 자연빈도에 기초한 소통을 의무화시켰고, 2020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노력으로 모든 의사가 자연빈도를 익혀 검사 결과에 해석에 필요한 조건부확률을 이해하게 됐다. 세계보건기구는 회원국에서 투명한 위험 소통을 목표로 하는 항정신오염법을 통과시켜, 의과대학생이 상대위험도가 아니라 절대위험도로 위험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은 통계적 사고에 기반한 계산맹 평가 문항을 포함시켰고, 15세 학생 95%가 통과한 어떤 국가는 통계맹 퇴치를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전세계에서 통계맹 퇴치를 위한 교육 훈련에 약 100억불 이상의 예산이 투입됐다는 추정도 발표됐다.


위는 저명한 인지심리학자인 게르트 기거렌처 막스플랑크협회 인지개발연구소장이 2008년에 발표한 『인류의 이성: 인간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처하는가」라는 책 에필로그에 실린 가상 대담의 일부다. 기거렌처 소장의 희망섞인 기대와 달리 2017년 현재 세계는 왜곡된 정보로 가득한 가짜뉴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은 주요 언론이 365일 24시간 가짜뉴스를 쏟아내고 있다는 표현을 SNS에 여과없이 내보냈고, 전직 한국 대통령을 탄핵시킨 스모킹건인 태블릿피시가 발견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증거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대중은 모든 숫자와 통계는 당연히 조작됐다고 믿고 있다. 1천명을 무작위로 뽑아 수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겨우 1천명이 어떻게 5천만명을 대표하는 의견이냐는 비난에 무력하다. 백신 음모론에 심취한 어떤 한의사는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안아키)’라는 카페를 만들어 예방접종 거부를 선동하기도 했다. 분노에 찬 어떤 네티즌은 그렇게 큰 아이들이 나중에 ‘약 안쓰고 어르신 모시기(안어모)’를 만들어 봉양해도 되겠느냐는 촌철살인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톰 니콜스 미국 해군대학교수는 2017년 발표한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에서 전문가는 투명한 소통에 기초한 교육을 수행할 책임이 있고, 대중은 배워서 알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이미 1938년에 발표한 소설 ‘월드 브레인’에 “오늘날 일정한 기본 통계 교육은 읽기와 쓰기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항목이 되고 있다.”는 명문을 남겼다. 전문 지식조차 간단한 키워드만 검색 엔진에 입력하면 셀 수 없이 많은 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인터넷 시대 교육은 검색 능력이 아니라, 정보 홍수 속에서 옥석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는 최근 헌법 개정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헌법 내 과학기술이라는 용어 사용과 과학기술 정책에서 국가의 역할에 관한 의견 등을 조사해 과학기술인의 개헌 의견을 알리기 위한.행동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교육의 권리와 의무를 천명한 현행 헌법 제31조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와,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와 같은 조항을 담고 있다. 개정 헌법의 교육의 권리와 의무 조항에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 통계맹 퇴치를 선언적으로라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2054년은 통계맹 퇴치 원년이 아니라 민주주의 폐기 원년으로 역사에 기록될 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톰 니콜스 (2017), 전문가와 강적들, 오르마.

Gerd Gigerenzer (2008), Rationality for Mortal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osted by 사이버독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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