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번역자가 관련 전문 지식이 부족해 적절하지 않은 용어와 표현으로 옮긴 경우다. 다른 하나는 번역자와 편집자가 게을러 얼토당토 않게 옮긴 경우다. 전자는 정황 상 이해되기도 하지만 후자는 돈내고 책을 사는 독자를 우롱하는 행위다.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The Theory That Would Not Die'가 '불멸의 이론'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스위스 학회 참석 중에 이 소식을 알고 부랴부랴 주문해 일단 '8장. 질병의 원인을 찾다'부터 원문과 대조해 읽어봤다. 전공자로서 실망을 넘어 분노를 치밀게 하는 번역이 보이길래 블로그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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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쪽. 8장. 질병의 원인을 찾다

- 8장의 원제는 "제롬 콘필드, 폐암, 심장 발작(Jerome Cornfield, Lung Cancer, Heart Attack)"이다. 역자는 1장 원제인 "공기 중의 원인(Causes in the air)"을 "토머스 베이즈, 이론을 탄생시키다"로, 2장 원제인 "모든 것을 이룬 남자(The Man Who Did Everything)"를 "라플라스, 모든 것을 이루었던 남자"로 옮겼다. 콘필드가 베이즈나 라플라스보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건 분명하지만 관련 전공자 입장에서 매우 아쉽다.


244쪽. 현대적인 개념의 임상실험

- 원문의 modern controlled clinical trial을 번역한 표현이다. 대조라는 단어는 빼더라도 임상시험을 책 전체에서 임상실험으로 옮겨놓은 점은 큰 문제다. 임상시험은 이미 식약처 고시나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집에 나와 있는 용어다.


245쪽. 힐과 젊은 의사 한 명 그리고 전염병학자 리처드 돌, 이렇게 세 사람

- 책 번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한 순간에 무너진 부분이다. 원문의 Hill and a young physician and epidemiologist, Richard Doll을 위와 같이 옮겼다. 힐과 젊은 의사이자 역학자인 리처드 돌로 옮겨야 한다. 역자는 위대한 역학자 리처드 돌 경(Sir Richard Doll)의 일생에 대해 찾아본 적도 없음이 분명하다. 책 전체에서 epidemiology(-ist)를 역학(자)가 아니라 일관되게 전염병학(자)로 옮겨놓은 부분은 출판사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들게 만들었다.


245쪽. 1918년에 발생했던 인플루엔자 전염병 사례

- 원문은 the influenza epidemic of 1918이다. epidemic도 그냥 전염병으로 옮겼다. '유행' 또는 '대유행'으로 옮긴다. 이 정도는 온라인 영어 사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용어다.


245쪽. 비전염성 질병에 대한 최초의 정교한 비교대조연구법(case-control study)

- 원문은 the first sophisticated case-control study of any noninfectious disease다. infectious disease는 이제 공식적으로 감염성 질병으로 옮긴다는 점은 넘어가자. case-control study는 의학용어집에 '환자-대조군 연구' 또는 '사례 대조 연구'로 명시되어 있다. 비교대조연구법은 도대체 어느 문헌을 참고했는지 알 수가 없다.


246쪽. 콘필드는 1933년에 뉴욕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 원문은 Cornfield had earned a bachelor's degree from New York University in 1933이다. 학사를 석사로 잘못 옮겼다. 졸지에 콘필드 선생이 학력 위조를 한 셈이 됐다. 더욱 문제는 이미 이 장 첫 문단에 "그가 받은 학위라고는 역사학 학사 학위뿐이었다."는 문장이, 마지막에 "1974년, 역사학 학사 학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베이지안 생물통계학자가 미국 통계협회의 회장이 되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같은 장 안에서 학사와 석사라는 표현이 충돌하는 점은 역자와 편집자의 조바심과 게으름을 동시에 보여주는 근거다.


247쪽. 표본 작업만이 실업자 수를 짐작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 표본 작업의 원문은 sampling이다. 주로 (통계적) 표본 추출로 옮긴다.


247쪽. 아프리카계 미국인 서기 한 명

- 원문은 an African American statistical clerk다. 흑인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쓴 부분은 저자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했다고 읽을 수 있다. statistical clerk는 서기가 아니라 통계 조수다.


248쪽. 국립보건원의 전염병 전문가들은 만성 질병을 상대로 집중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 위에 지적한 대로 역자는 epidemiologist를 예외 없이 전염병 전문가 또는 전염병 학자로 옮겨놓고 있다. 심지어 위의 문장처럼 바로 이어서 만성 질병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이쯤되면 역자가 전염병과 만성병의 정의를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248쪽.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틀어서 국립보건원이 고용했던 사람들 가운데 통계 전문가가 가장 많을 때라고 해봐야 그 비중은 10~2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 '10~20퍼센트밖에'라는 대목에 놀라 원문을 살폈다. throughout the 1950s and 1960s NIH employed only ten or 20 statisticians at any one time이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50년대와 60년대 어느 시기에도 열명에서 스무명 이상 고용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도 미국 국립보건원에 근무하는 통계학자는 전체 인력의 10퍼센트가 넘지 않을 듯하다.


250쪽. 과거지향적인 회고적 연구(retrospective study)

- 바로 앞쪽에서는 retrospective를 모두 과거지향적으로 옮기더니 이쪽에서는 회고적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전향적 연구(prospective study)가 나오므로 후향적으로 쓰면 된다. 옮길 때 의학용어집을 참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를 옮긴 이한음 씨는 retrospective를 역행적, prospective를 순행적이라고 창의적으로(!) 옮겼다.


251쪽. 메이오클리닉의 조셉 버크슨

- Mayo Clinic은 메이요 병원으로 옮긴다.


253쪽. 나이가 들면서 이 유전적 요인은 점점 약해져 담배를 많이 끊게 될 것이다.

- 피셔가 말한 대로 폐암의 원인이 흡연이 아니라 유전이라면 당연히 일어나야 할 상황을 콘필드가 가정해서 설명한 대목 중 한 문장이다. 유전적 요인이 약해져 담배를 많이 끊는다가 무슨 뜻일까? 원문은 Fisher's genetic factor would have to ... ; weaken with age after a smoker quit; 이다. 흡연자가 담배를 끊은 다음 나이가 들수록 유전적 요인은 약해질 것이다 정도가 좋겠다.


253쪽. 끊임없이 수정되던 가설이 이제 더이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 하나도 즐거운 내용이 아닌데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가 무슨 뜻일까 읽다가 궁금해졌다. 원문은 when a continuously modified hypothesis becomes difficult to entertain seriously다. 가설이 계속 수정되면 더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정도로 해석된다. 옮겨놓고 맥락이 이상하면 사전을 뒤져 entertain이라는 동사에 '받아들이다'는 뜻이 있음을 확인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253쪽. 1964년에 미국 공중위생국은 "흡연은 폐암과 인과적인 관련이 있다."고 발표...

- 흡연과 건강에 관한 연구에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는 1964년 미국 공중보건총감(US Surgeon General) 보고서를 인용한 대목이다. 원문은 "남성에서 흡연은 폐암과 인과적 관련이 있다"로 나와 있다.


254쪽. 콘필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고 곧 웃으면서 말했다. "크리스, 나도 그걸 곧 받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 위원회 동료 위원이 표본 크기를 질의하는 편지를 받았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내용이다. 유머러스한 콘필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전혀 우습지가 않다. 원문은 There was a pause, and Cornfield grinned and said, "Christ, I hope so."다. 왜 답이 없냐는 성가신 핀잔을 받고 잠시 침묵하다가 웃으며 "세상에, 나도 곧 받길 바랍니다."로 퉁치며 넘어간 일화다. 졸지에 질문자 이름이 크리스가 됐다.


255쪽. 비누에 이 함수의 그래프를 그려서 시각화하기도 했다.

- 그래프를 그릴거면 칠판이나 종이에 그리지 굳이 비누에 그릴 이유가 없다. 원문에 쓰인 단어는 carving이다. 막대 비누를 깎아 까다로운 분포 함수를 시각화했다는 뜻이다.


255쪽. 살크 소아마비 백신

-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사람은 조너스 소크(Jonas Salk)다. 그의 이름을 딴 '소크 연구소'가 캘리포니아 주 라호야에 있다.


258쪽. 저혈압과 저콜레스테롤이라는 조건의 사람들에 비해서 심장병에 거릴 위험은 23퍼센트밖에 높지 않았다.

- '거릴'은 '걸릴'의 오타다. 23% more at risk라는 표현에 '밖에'라는 뜻은 없다. 23퍼센트나 높았다가 맞다.


258쪽. 복합 로지스틱 위험함수

- multiple logistic risk function은 다중 로지스틱 위험 함수로 옮긴다.


259쪽. "만일 피셔가 말했던 유의수준의 유지가 잠정적인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유의수준이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피셔와 평생 논쟁했던 콘필드의 육성을 인용한 대목이라 집중해서 읽었는데 번역 문장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원문은 이렇다. "If maintenance of [Fisher's] significance level interferes with the release of interim results, all I can say is so much the worse for the significance level."이다. 대략 옮기면 "[피셔의] 유의 수준을 유지하느라 중간 결과를 발표하기 어렵다면, 나는 그럴수록 유의 수준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가 된다. 피셔, 네이만, 콘필드가 벌인 가설 검정 논쟁 역사를 잘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260쪽. 주류 통계학 잡지

- mainstream statistics journals를 이렇게 옮겼다. 권위 있는 통계학 학술지 정도로 옮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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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13장 대통령이 될 사람은 누구인가부터 등장하는 현대 통계학의 천재 중 한 명이자 살즈버그가 "통계학의 피카소"로 묘사했던 존 튜키(John Tukey)를 일관되게 '터키'로 표기한 부분이 매우 거슬렸다. 링크한 위키백과만 찾아보더라도 발음 기호가 분명하게 나와 있다.


통계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책으로 19세기까지는 스티글러의 "통계학의 역사", 20세기는 살즈버그의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인가", 그리고 베이지언 통계학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 "불멸의 이론"을 추천할 수 있게 됐다. 조재근 교수님이 번역한 "통계학의 역사"를 제외하고 다른 두 권은 원저의 가치를 매우 깎아먹는 번역이 답답하고 아쉽다. 단언컨대, 학문의 위기는 번역의 위기다.

Posted by 사이버독 cyber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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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그지기 2013.08.29 08:5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휴먼사이언스의 게으른 담당 편집자입니다.;;
    우선 저희 책 구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생소한 분야다 보니 책을 만드는 데 있어 많은 게으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적해주신 사항과 그 외의 수정할 사항들을 다시 꼼꼼하게 점검해서 재판 때는 꼭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회고적 연구는 역자분께서 전향적 / 후향적 연구라고 하신 것을 제가 회고적 연구라고 수정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기대해주셨는데 실망스러운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조금 더 나아진 모습 보여드리려 노력하겠습니다. 지적 감사드리고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

    • 사이버독 cyberdoc 2013.08.29 15:1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담당 편집자님께,
      개인 블로그다보니 다소 거친 표현이 있었음을 양해바랍니다. 원서 출간 이후로 언제 번역서가 나오나 기다리다가 번역서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기대가 컸습니다. 한국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 분야 전문 서적은 민망한 수준의 판매량이라는 소식도 전해들었습니다. 어렵게 출판해주신 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만, 번역서가 나온다면 제대로 옮겨져야 긍정의 선순환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재판 때 수정해주신다고 약속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